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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북한산 백운대 구파발역 방향 코스

 

 

 

 

 

 북한산 백운대 코스, 3호선 구파발 역에서 2번 출구로 나와 8772/34/704번을 타고 북한산성입구에서 하차하여,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분소 입구에서 시작하여 북한산국립공원우이분소 까지의 횡단 코스이다.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분소 입구->서암사-> 북한동역사관(새마을 교)->보리사->상운사 갈림길->대동사 갈림길(대동사 일주문)->백운동 암문(위문)->백운대->백운대 대피소->북한산경찰산악구조대->백운탐방지원센터->도선사->북한산국립공원우이분소 여기서 가장 가까운 역은 4호선 수유역으로 153번이나 120번 버스를 타야한다. 글을 쓰기에 앞서서 역사적 사료를 참고한 사이트 및 뉴스 자료는 다음과 같다.

 

고양 문화원

http://www.goyangcc.or.kr/

다음 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4788

북한산성 공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buksamo

은평구 문화 체육관광

http://cult.ep.go.kr/CmsWeb/viewPage.req?idx=PG0000003362#

한국 콘텐츠 진흥원

https://www.kocca.kr/

 

서울신문 [씨줄날줄] 부아악(負兒嶽)/이용원 논설위원 2005-11-23

불교신문 백운의 봉우리를 본 이성계는…」 2013.10.15

대한뉴스 제 1102호-북한산 통일 서원비 제막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1983년 우리나라의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총면적(도봉산 포함)80.669.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우이령(牛耳嶺)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한산의 정상은 백운대(836.5m)·인수봉(810.5m)·만경대(799.5m)로 조선시대에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최고봉 백운대(白雲臺)와 그 동쪽의 인수봉(仁壽峰), 남쪽의 만경대(萬景臺, 일명 국망봉)의 세 봉우리가 삼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삼봉산(三峰山, 세봉오리로 이루어진 산), 화산(華山, 꽃이 만발하는 산) 또는 부아악(負兒岳,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 등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북한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부터라고 추정된다.

 

 

 

 백운대로 가는 길은 서대문을 지나는 코스가 있고 , 서암사 방향으로 북한 천을 지나는 코스가 있다. 여기서는 서암사 방향으로 백운대 4.km 라는 푯말 방향으로 가면 서대문 방향으로 가는 것보다 약간 멀지만, 하얀 암석을 타고 흐르는 물이 내려와 물줄기를 이루면서 흘러내려 가는 북한 천의 암석과 어우러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북한천의 작은 물줄기는 흐르고 흘러 창룡천으로 흘러 다시 더 큰 강줄기인 한강으로 흐른다.

 

 

 북한산의 각 봉우리 사이를 흐르는 계곡으로는 정릉계곡·구천계곡·소귀천계곡·육모정계곡·효자리계곡·삼천사계곡·세검정계곡·진관사계곡·구기계곡·평창계곡·산성계곡 등이 있다. 이들 북한산에서 발원한 계류는 중량천·창룡천·불광천·모래내 등을 이루어 한강으로 유입된다. 그러므로 북한천은 각각의 계곡들의 물줄기를 받으면서 흐르는 것이다. 바위의 높낮이의 험준함 속의 역동적인 물의 낙하 속에 때로는 물줄기가 고여 잔잔히 흐르는 정적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도심 속의 청정한 계곡이라는 이질적인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시간의 흐름조차 멈추어 보이지만, 물줄기의 흐름은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다시 거침없는 시냇물의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북한천을 거쳐 올라오면 새마을 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새마을 교 다리 바로 뒤 편에 북한동 역사관이 있다. 북한 동 역사관에서는 북한산에 관련된 역사적 흐름을 알 수 있고 한글/영문으로 된 북한산 지도 팜플렛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새마을교 다리를 건너 왼쪽에 보리사(사진 왼쪽에 보이는 건물)가 있고 보리사 쪽으로 30분가량 올라가면 상운사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다리를 건너면 상운사 일주문이 나오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백운대 암문(위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위 사진은 대동사 일주문을 막지나 온 내천과 돌계단이다. 티없이 새하얀 눈은 모든 만물을 감싸고 정적으로 뒤덮고 있다. 여기서부터 쭉 가면 백운동 암문이 나온다. 백운동 암문까지 길이 하나이기에 헤맬 염려는 없지만, 험하여 체력이 상당히 필요 하다.

 

 

  북한산성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은 북한산의 주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836.5m)와 만경대(萬景臺, 799.5m) 사이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위문(衛門)으로 불려왔다. 1711(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이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고,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됐다. 일종의 비상출입구이지만,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개 마루나 능선에 설치하여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백운봉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다. 문은 성문 양쪽을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 천장부분을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형식의 성문을 아치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확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구멍이 남아 있다.

 

 

 벽체를 두텁게 쌓아 올리고 석재도 특별히 반듯하게 다듬은 돌을 사용하는 등, 방어에 있어서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곳이 바로 성의 출입을 통제하는 출입문인 성문(城門)이다.성문은 대부분의 성에서 동서남북 네 면에 만든다. 그러나 큰 성곽이 아닌 경우에는 북문이 없는 경우도 많다. 고대의 토성에서는 성문을 따로 만들지 않고 성벽을 엇갈려 터 놓는다든지 갖가지 모양으로 성벽을 교묘하게 꺾어서 접근을 어렵게 하는 구조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아치로 육축(陸築)을 쌓고 판문을 달았으며 위에는 누각건물을 지어 성문을 규정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때 성문은 불화살 등의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철판을 씌우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성문 중에서는 사대문 외에 적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평상시 백성들이 쉽게 출입할 수 있도록 보조 출입문을 만드는데 이를 암문(暗門)이라고 한다.

 

(만경대 정면 사진)

 

 

  백운대 암문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운대 정상으로 통하는 길이 나온다. 백운대는 서울시 도봉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있는 북한산 최고봉으로 높이는 836m에 이른다. 맑은 날에는 인천 앞바다와, 강화도의 마니산, 개성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으며 백운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조선창업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성계는 공손하게 예를 갖춘 후 무학대사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해몽을 청했다. 하지만 무학대사는 조용히 이성계의 얼굴을 바라볼 뿐 좀 채로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긴장 속에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무학대사가 꿈을 해설 해 주었다.

등에 서까래를 짊어졌으니 임금 왕()자 형상이 분명하고, 꽃이 떨어졌으니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힐 것이며, 거울이 깨졌다는 것은 세상이 시끄럽게 된다는 뜻이니 조만간 새 임금이 탄생될 징조로 참으로 큰 꿈이 외다.”

 

  무학대사로부터 꿈 해몽을 들은 이성계의 가슴은 감격과 두려움으로 떨렸다. 그동안 변방을 지키며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 온 이성계로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쇠락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강력한 새 왕조를 세워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막상 무학대사로부터 새 왕조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나니 두려움이 앞섰다.

 

대사님, 제게 좀 더 확실한 언질을 주십시오. 과연 제가 그 대업을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오직 하늘만 알 뿐 소승은 모르는 일이외다.”

그럼 하늘의 뜻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이성계로부터 질문을 받은 무학대사는 잠시 눈을 감고 선정에 들어 있다가 이렇게 대답 했다.

 

장차 도읍을 정하게 될 땅엔 세 개의 산봉우리가 있을 것이외다. 그중에서 백운(白雲)을 찾도록 하십시오. 하늘이 장군을 허락한다면 백운이 그 위용을 드러내게 될 것이외다.”

 

  이성계는 스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고 물러났다. 그러면서 백운(白雲)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속에 깊이 새기며, 새 왕조를 세우려는 야망을 조심스럽게 키워갔다.

 

  왜구와 홍건적의 침략을 막아내며 용맹함을 떨쳤던 이성계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은 날로 더해갔다. 1388년 우왕이 즉위한지 14년째 되는 해였다. 원을 격파한 명이 예전 원의 땅이었던 철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고 했다. 고려조정은 명의 요구를 거절하고 요동을 정벌하려 했으나 이성계의 생각은 달랐다.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왕명을 따라야 할지? 자신의 판단을 따라야 할지? 기로에 선 이성계의 머릿속에 백운(白雲)’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왕명을 받고 오랜만에 개경으로 온 이성계는 개경 주변을 돌다가 남경이라고 불리는 한강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는 한강 주변의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면서 산세를 살피다가 지나가는 한 노인을 붙들고, 세 개의 산봉우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산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대답 없이 지팡이를 들어 등 뒤의 산을 가리켰다. 이성계는 노인이 가리키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길이 나 있지 않은 산은 한 발자국도 옮기기가 힘들었다. 전쟁터를 누비고 살아 온 그였지만 칡넝쿨과 가시덤불, 바위와 나뭇가지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산을 오르는 일은 참으로 험난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산길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결심을 굳힐 강력한 자기암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얼마간 그렇게 산길을 오르자 뿔처럼 높이 솟은 세 개의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났다. 그 봉우리들을 보는 순간 이성계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자기가 찾고 있는 봉우리들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흙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소나무는 마치 수없이 많은 전쟁터에서 위태롭게 살아온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성계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봉우리가 셋임은 분명한데 그 봉우리들은 검은 구름에 감겨 있어서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백운(白雲),자신이 찾고 있는 봉우리는 어느 것인가? 검은 구름에 가려있는 세 개의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성계의 가슴은 흔들렸다. 백운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불안감에 젖어 있던 이성계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세 개의 봉우리가 잘 보이는 자리에 정좌하고 앉았다. 그리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힌 뒤 산봉우리를 우러러 보며 기도를 드렸다. “꼭 부강한 나라를 세워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겠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성계의 눈앞에 기적처럼 한 봉우리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봉우리 주위로 흰 구름이 겹겹이 둘러 쳐지고 있었다. 흰 구름에 쌓여 있는 봉우리는 너무도 신령스러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경건해 졌다. 이성계는 하늘의 화답에 감격해하며 오랫동안 흰 구름에 쌓인 산봉우리를 우러러 보았다. 이성계에게 왕의 자리를 허락해준 봉우리를 사람들은 백운대로 부르게 되었다.

 

(불교신문 백운의 봉우리를 본 이성계는…」 2013.10.15 )

 

 

 

백운봉에 올라[登白雲峰]

 

넝쿨 움켜쥐며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引手攀蘿上碧峰

흰 구름 가운데 암자 하나 걸려 있네一庵高臥白雲中

눈에 보이는 곳 우리 땅으로 한다면 若將眼界爲吾土

오월의 강남 땅도 그 속에 있으련만吳越江南豈不容

 

<출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열성어제(列聖御製)// 태조(太祖) 이성계

 

  위 시는 이성계의 개국의 이상과 더불어 중국, 만주까지 차지하려는 그의 북벌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태조때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과 세종 때 최윤덕김종서의 평안도와 함경도 확보는 바로 이런 조선초기의 북벌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라고 한다.

 

 

 

 

  백운대 등정은 이성계의 신 국가에 대한 원대한 포부와 이상을 이뤄줄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로프나 계단이 있어 편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지만, 이성계의 백운대 등정은 목숨을 걸며 국가건립에 대한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시험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백운대까지 오르기까지 길도 나있지 않았을 터이고, 길 없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면서 덤불을 헤치며 길을 터는 모습에서 이제껏 존재 하지 않는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이끌어내는 자신을 그렸을 것이다. 산길을 오르는 데 방해하는 넝쿨과 가시덤불이 가로막고 있으며, 온갖 위험한 산짐승이 도사리며 자신들 위협하는 상황은 정적들과의 암투 나라를 세우기 위해 거쳐 가야할 수많은 장애물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새 나라에 대한 염원과 그 염원의 성취는 조선의 멸망 이후 나라를 잃은 독립 운동가들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3.1 운동 암각문은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白雲峰) 정상의 화강암 바위에 새겨져 있다. 기록문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정재용(鄭在鎔)31운동(運動)의 역사적 사실을 후게(後世)에 전()하기 위하여 평평한 바위 위에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네 글자를 세기고, 그 안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은 기미년(己未年) 210일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하였으며 31일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자신이 독립선언(獨立宣言) 만세를 도창(導唱)했다.”는 내용이 정자체(正字體)로 새겨져 있다. 이 글을 새긴 시기 및 그 목적에 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1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 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글을 새긴 정재용(鄭在鎔)1886년 해주(海州)에서 출생(出生)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9219일 해주에서 상경(上京)하여 31운동 전날밤 서울역에서 100장의 독립선언서를 원산교회로 송달하고 남은 한 장을 가지고 있다가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이를 낭독하여 31운동의 불을 당겼던 선각자이다. 그후 해주(海州)로 귀향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0120일 일제(日帝)에의해 검거되어 2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평양(平壤)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769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듬해인 1977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잃어버린 조국과 되찾고 싶었던 염원은 분단 된 국가라는 모습으로 시작 되었다. 일제강점기속의 상실감과 6.25동란의 처절한 고난을 거쳐 얻은 나라는 해결해야할 과제들만 안은 반쪽짜리 나라였다. 현실에서 필요한 가난의 극복과 산업화라는 난제 속에서 남북이 하나가 된 통일국가의 모습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꿈과 같은 것이었지만, 높고 험난한 등정을 하는 산악회회원들이 품은 바람과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기원은 백운대를 오르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를 바라고, 잃어버린 국가를 찾으려는 영웅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찾으려 했을 터이다.

 

 

 

 

 백운대 대피소 기점으로 가려면 백운동 암문을 거쳐 바로 밑으로 내려오면 된다. 내려가다 보면 백운대 대피소 기점이 나온다. 일종의 산악인들의 휴식처 같은 지점으로 화장실이 있으며, 북한산성에 대한 설명을 적은 푯말이 있다.

 

 

  산성이 위치한 북한산은 지세가 매우 험준하여 방어처로서 매우 적절한 환경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았던 지역으로 당시에도 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132(백제 개루왕 6)에 백제가 북한산에 성을 쌓았고,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공격을 받아 함락되어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었다. 551(신라 진흥왕 12)에는 나제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백제는 한강하류를 점령하고, 신라는 이 지역을 포함한 죽령 이북 10군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553년에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 하류까지 점령하고, 555년에는 북한산의 비봉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603(신라 진평왕 25)에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61(신라 무열왕 8)에도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몇 차례 성을 수축하였고, 고려 8대 현종(顯宗)은 거란족 침입시에 북한산성의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232년 몽고 2차 침입때에는 북한산의 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태조의 재궁(梓宮: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이곳에 옮긴 일도 있었다. 고려말인 1388년에는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중흥성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는 등 북한산성 일대의 군사적 중요성은 지속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대외적 전란과 이괄의 난 등 대내적 위협을 겪고 수도 방위에 문제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북한산성의 본격적인 축성에 대한 논의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산성 축성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르던 1595(선조 29)부터 병자호란 때 청()에 인질로 끌려갔었던 효종조, 1675(숙종 원년)1702(숙종 28), 1703(숙종 29), 1710(숙종 36) 등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본격적인 북한산성 축성 논의는 숙종 초기부터 계속되어왔으나 본격적인 논의는 숙종때부터 시작된다. 먼저 초기의 기록인 숙종실록29, 120(병인)에 의하면, 1703년 논의 당시 우의정 신완(申琬)은 왕에게 만언차(萬言箚)를 올려 강도(江都: 강화도)는 수세(水勢)가 예전과 같지 않고 남한산성은 고절(孤絶)하여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외적 침입시 오랫동안 항전할 수 있는 북한산성 축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숙종의 허락을 받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으나 축성에 대한 청의 오해 소지, 국가 재정의 궁핍, 그리고 도성의 지맥을 훼손한다는 풍수지리적 이유 등으로 축성 반대론에 부딪혀 결국 실행단계에서 중단되게 되었다. 대신 도성을 수축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먼저 1704(숙종 30) 도성의 수축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 또한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1710(숙종 36)에 완료되었다.

 

  도성의 수축이 일단락 되면서 북한산성의 축성론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당시 청()이 해적의 출몰에 대비하라는 자문(咨文)을 보내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명시된 성지수축금지조항 사문화되었기 때문에 종래의 청()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710년에 축성론이 또다시 제기된 이유는 도성수비에 대한 불안감 증대, 바다()와 육지()의 적으로 부터의 침입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 성곽의 축조에 대한 청의 견제책 미비, 노론(老論)이 소론(小論)을 압도하고 지배권을 장악한 정치상황, 그리고 상인세력의 신장과 농업생산력의 향상 등에 의한 경제적 성장 및 실학사상의 태동 등 사회적 변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와 대내외적인 환경은 북한산성의 축성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7109월부터 활기를 띠어 판부사 이이명이 강력히 축성을 주장하고, 10월에는 훈련대장 이기하(李基夏)가 북한산의 형세를 답사하고 북한산의 지리적 합리성을 극찬하며 축성을 주장하게 된다. 12월에는 어영대장 김석연 등이 다시 주장하고, 우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북한산을 답사하였다.

 

  축성반대론을 펼친 부제학 조태로(趙泰老)와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 등은 종묘사직과 백성이 있는 도성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새로이 축성하는 것 보다 상책이라며 극력 반대하였지만, 대신들의 축성론이 우세하고 숙종의 축성 의지가 명확해지면서 1711(숙종 37) 2월에 북한산성의 축성 결정이 내려지고 4월에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축성은 43일에 시작하여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이 각기 축성 영역을 분담 진행함으로써 6개월 후인 1019일에 공사를 마쳤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를 비롯하여 도성의 주민과 모역군(募役軍), 그리고 각종 공장(工匠)과 승군(僧軍)이 동원되었다. 축성 기간은 그 규모에 비하여 매우 짧은 기간인데, 이는 도성의 수축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군() 중심의 일사불란한 계획수립과 시행, 그리고 국방상의 시급성과 청()에 이의제기 내지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매우 서둘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숙종대의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는 산성내 행궁의 영건이 마무리되던 1712(숙종 38) 410일에 북한산성 시찰을 한 이후 관리운영상의 부작용으로 원성의 대상이 되었고, 영조대에 이르러서는 도성방어 중심으로 국방정책이 변경되면서 북한산성의 폐지 요구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북한산성은 고종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갑오개혁 이후 관심에서 멀어져 승군제도가 폐지되고, 의병전쟁과 군대 해산,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등의 변혁기를 맞아 몰락의 길을 맞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콘텐츠 진흥원 )

 

 

 

 

  벽돌 건물 뒷편의 나무쪽으로 가면 도선사를 거쳐 하산 할 수 있다. 북한산의 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군사적 방어를 위해 축성이 이루어졌다. 군사적 요충지와 수도방어의 중요성으로서 나라의 안위와 호국을 위해 중요한 지리적인 요충지인 것이다. 수도방위의 절실함 임진왜란의 전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세와 병자호란의 치욕의 역사 속에서 축성을 시작한 북한산성이었으나 정작 축성을 완공하고 나서는 결정적인 외세의 침탈에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백운대대피소 기점에서 내려가는 산세에  새하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화살표 부근이 인수봉에 대한 설명문이 있는 자리이다. 안내문 바로 앞이라서 인수봉인줄 알았는데 지도를 보니 아래의 나무로 바위를 가린  사진은 북한산 잠수함 바위로 보인다.

 

 

  인수봉에 얽힌 백제 도읍에 얽힌 설화를 적은 안내문이다. 백제의 도읍을 인수봉에 올라 정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른 설이 있다. 사람이 인수봉을 오른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45년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第1)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溫祚)가 기원 전 18년에 열 명의 신하를 이끌고 부아악에 올라 살 곳을 살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지금도 인수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특수한 장비와 등반기술을 구사해야 하는데, 2000년 전에 이처럼 험난한 암벽을 10명의 신하를 이끌고 올랐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온조의 부아악 등정은 백제의 건국설화로 볼 수밖에 없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은 설화치고는 그 내용이 사뭇 구체적인 점에 의문이 앞선다.인수봉은 아기를 업은 모습과 같다해서 옛 부터 부아악(負兒岳)이라 불렀다. 그러나 부아악이 지금의 인수봉이라는 통념과 달리 부아악은 북한산의 인수봉이 아닌, 경기도 용인에 있는 부아산(404m)이라는 이견이 있다.

 

  백제의 첫 도읍지가 직산 위례성이라면 용인의 부아산과 직산은 불과 1백리 남짓한 근거리에 있다. 용인 부아산에 오르면 직산의 도읍지를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부아악이 북한산의 인수봉이라면 이곳에서 2백 여리나 떨어진 직산을 살펴본다는 것은 지형조건상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도읍지를 살펴본 산은 용인의 부아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는 것이다.

 

 

  북한산산악구조대 앞에 인수암이 있고 여기서 조금 가면 백운동탐방센터가 나오고 도선사가 보인다.

 

 

  우이천은 겨울에는 얼어 있어 힘차고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물살을 보기 힘들다. 눈으로 덮여 얼어붙어 메마른 느낌이든다.  우이천을 따라 약 2km 정도 가면 북한산국립공원 이라 적인 글자가 적힌 기둥이 보인다. 이곳이  북한산우이분소 사무소 지점이다. 여기서 400미터를 더 가야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120/153번 버스를 타면 가장 가까운 역이 4호선 수유역이다. 수유역 까지는 20~30분 정도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