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화 라노벨감상

요시다 모토이의 官能先生(관능선생)의 불안한 출발에 대하여(1)

 

 

(진지한 음탕한 사랑 이라는 자극적 표지 제목외에도 신발을 고쳐주는 소설가 나루미의 모습에서 작품의 방향성을 짐작케 한다.)

 

 

 

 「官能先生(관능선생)2016726イブニング(이브닝)16호에서 요시다 모토이(吉田基已)가 연재를 시작하는 작품이다. 前日(여름 전날)이후로는 2년 만의 신작이다. 恋風(연풍)여름 전날사이의 갭을 생각하면 상당히 빠른 작품 연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연풍이 완간 된 이후에 여름 전날이 연재된 것이 2009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2년은 준비기간에 있어서 절반으로 단축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몇 가지 관점에서 상당히 불안한 출발이 감지된다. 물론 단지 시간만 빠르다고 해서 작품 질이 낮을 것이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여름 전날에서 보여준 이야기의 짜임새는 준비 기간 면에서나 연재 면에서 연풍에 비해 상당한 시일을 투입했는데도 연풍에서 보여준 창조적 갈등적 상황과 개연성 있는 해소라는 관점에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차치 하고서라도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 상당히 진부하고 지루한 전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연풍에 대한 글(1-스토리. 2-나노카의 상징성 3-꽃과 바람의 상징성 4-TV과 원작과의 차이)을 마친 후에 요시다 모토이의 남성관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글을 슬까 생각했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관능선생이라는 불안 요소를 앞에 두고 작가론을 쓴다는 것은 시기상조이기 때문이다. 만일 요시다 모토이의 남성관은 쓴다면 연재가 끝난 후에나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최소한 작가의 성향을 알기 위해선 3작품 이상을 보고 평가해야 한다. 물론 한 작품 가지고 수십 년씩 쓰는 작가들은 예외이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원래 한 작가의 작품은 연재 중에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첫 회만 보고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건 나중에 이야기 완결 된걸 놓고 봤을 때 비웃음거리로 전락 할 가능성이 큰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요시다 모토이처럼 작품집필에 계획성을 가지고 쓰는 작가는 더더욱 그렇다 요시다 모토이는 일관성 있게 5권 씩 작품 분량의 틀을 맞추고 거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생각을 불어 넣는다. 이건 개인적 추측이지만 대학생 논문 쓰는 것처럼 제목 목차 쓰고 결론까지 생각한 다음에 살을 붙이는 것처럼 작가는 이미 자료 다 모아 놓고 중요 대사 및 이야기와 결론까지 정한 뒤에 살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작가의 작품을 보면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첫 화의 메인 그림 이 장면은  5권 마지막에 한번 더 나온다. 작품의 방향성은 물론이고  아키라가 말하는  영혼의 울림 이라는 초월적 자유에 대한 작품의 주제 모두를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요시다 작가의 작품에서는 각각 작품 마다 공통적으로 땅을 디디는 인간이 현실에서의 갈망하는 초월적인 그 무엇에 대한 작가의 주제의식이 작품에 나타난다. 라고 연풍(恋風)-나노카의 상징성과 영원한 맹세에서 이미 밝힌 바가 있다. 이러한 일관성 있는 작가의 주제의식은 연풍은 물론 여름 전날에서도 나타난다. 그 방법은 우선 작가는 남녀간의 첫 만남한 컷에 5권의 내용 전체를 비유적으로 전체적으로 담아 그린다. 그리고 차근 차근 스무고개 하듯 단서를 주고 마지막 권에서 답을 알져주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패턴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연풍에서는 전철역에서 나노카와 코시로의 첫 만남에 대하여 코시로의 내면에서 잊고 있던 애타는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을 우연적 사건이라는 바람()과 나노카라는 무구한 여성성의 상징인 (벚꽃)이 흩날리는 정경을 자아내면서 단 한 컷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어 표현한다.

 

   여름 전날에서는 첫 만남에서 아키라가 지평선 저 너머를 화폭에 담고 있는 테츠오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다. 아키라가 풍경을 그리고 있는 테츠오를 응시하는장면이 그냥 작업량이나 때우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단 하나의 한 컷의 그림은 마지막에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날 때 한 번 더 나온다. 이 장면에 담긴 작가의 진의를 모르니까 여름 전날을 남녀간의 밀당이나 나쁜 남자에 대한 아키라의 순정정도로 치부 하는 것이다. 마찬 가지로 연풍에서도 마지막 권에서 한 번 더 바람과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두 사람의 운명적 인연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코시로가 자각한 타인에 대한 진실어린 애타는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는 의미 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첫 만남에 대하여 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린다고 볼 수 있으며 관능선생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요시다 모토이는 타 작가에 비해 굉장히 친절한 작가에 속한다. 그런데도 말귀를 못 알아먹고 엉뚱한 얘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통탄할 노릇이다 여름 전날의 주제는 결단코 일반 대중들이 말하는 남녀간의 밀당 혹은 이기적이고 나쁜 남자에 대한 아키라의 헌신 따위가 아니다. 그것을 5권 마지막부에 작가는 아키라의 입을 통해 대놓고 답까지 가르쳐 줬는데 작품을 코로 읽는지 한심한 소리를 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이게 다 대중들의 남성의 삶과 실존에 따른 영혼의 성장에 대한 인식 및 인간으로서 근기가 낮아서 일어나는 일이다. 에반게리온 같은 난해한 작품은 잘도 해석하면서 이렇게 대놓고 답까지 가르쳐주고 정성껏 상까지 차려주는데도 못 알아먹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요는 지식과 두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인식의 문제 즉,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연풍은 현실에서 상처받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는 남성의 실존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 애잔한 근친물로 전락하고 여름 전날은 나쁜 남자 테츠오와 농염한 사랑을 나누는 성인 만화나 테츠오란 개xx 때문에 눈물 흘리는 아키라의 가련한 사랑이라는 신파적 해석 혹은 남성향 작품이나 현시대의 연애에 소극적인 남성에 대한 지침서 같은 웃기는 이야기가 나오는 판국이다. 이러한 이 시대 대중들의 작품 평가에 대한 담론들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할 따름이다. 심지어 성적 대상을 여성으로 두지 않는다는 여성주의 작품 이라고 평을 하는 메x작가들을 옹호 하면서 자신이 몸담은 학교를 메x 소굴로 만든 모 만화 평론가도 있을 정도이다. 여성의 시각으로 본 작품이란 말은 정답이지만 여성주의는 엄연한 오류이다. 만약 여름 전날여성주의적 시각의 작품이라면 이상을 쫓는 남성의 인생을 아주 개 박살을 냈을 것이다. 게다가 테츠오는 여성에게 친절한남자가 아니다. 이런 남성의 최후는 타 작품 같으면 그 남자의 인생을 평범하게 못 끝낸다.

 

  예를 들면 후지 티비 드라마 메꽃 ~평일 오후 3시의 연인들~ (昼顔平日午後3恋人たち) 에는 화가로서 자본에 타협 하지 않는 순수하고 초월적 예술을 갈구하는 카토 오사무가 나오는데 가정주부인 리카코의 육탄공세에 넘어가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와의 육적관계를 지속하는 가운데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나 싶지만 표절시비에 걸려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손 못 쓰는 장애인이 되어 인생이 완전히 파탄이 나버린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남성과 그런 남성이 꾸리는 가정에 대하여 근저에 흐르는 분노와 적의감이 엿보인다. 주요 인물들은 모두 사회적 일탈을 했지만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은 남성들 밖에 없다. 거기에 마지막화에서 그런 적의감을 분명히 대사로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여름 전날에서는 그러한 기운을 감지 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여름 전날에서는 아키라에게 결론적으로 상처를 줬지만 하나미라는 여성으로 내면 안에 새로운 예술에 대한 자신감을 발견하고 완성된 해바라기 그림을 보고 만족한 표정으로 끝을 맺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기에 요시다 모토이는 이야기를 시작 할 때 단서를 하나씩 주고 마지막에 답을 던져주는 방식을 취하며 그 외에도 제목과 구성 그리고 비유까지 자신만의 구성을 하고 정해 놓고 작품을 쓴다고 판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첫 만남에서 연풍에서 바람(=우연적 사건)과 벚꽃(진실된 애절한 마음 or 나노카)으로 이어지는 운명적 인연(끊기 힘든 실)을 작품 속에 설정하고 여름 전날에서는 지상의 저 너머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현실 속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테츠오를 응시하는 아키라의 모습이 여름 정경을 배경으로 설정하면서 앞으로의 작품 주제를 암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비유적 방법의 하나로 연풍에서의 벚꽃은 시작과 완성을 의미하고 나노카를 상징하며 무구하고 순수한 마음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초월성을 상징한다. 여름 전날에서는 하나미라는 여성을 해바라기로 상정하고 해바라기에 자신감이라는 작가가 설정한 의미 외에도 해바라기의 꽃말 그대를 향한 올곧은 마음이란 의미를 작품 속에 넣는다. 물론 근거는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여름 전날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가의 성향으로 비추어 볼 때 관능선생에서는 몇 가지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출발을 내비추고 있다. 첫 째로 작중의 주인공의 직업이다. 여름 전날을 평가하는 일본 사이트 측 댓글 중에 좀 우스운 댓글을 봤는데 이제 제발 좀 미대생 얘기 화가 얘기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라는 글이다. (연풍을 제외한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 미대생이 나온다) 여름 전날에서 테츠오는 현실의 불완전한 세상을 완벽함으로 구현하는 미의 창조자로 표현되고 아키라는 그런 그의 모습에 빠져든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설작가로 바뀌었다.

 

 

 

(나루미 로쿠메이 40이 되어서도 방황하는 인생. 어느 여름날 밤 우연히 이끌린 소설가와 낯선 미녀 그리하여 두 사람이 풀어 낼 광적인 사랑의 기록.”  이라는 관능선생의 선전문구. )

 

  필자가 보기엔 미대생이나 소설가나 오십보백보이다. 2년 동안에 준비해서 나온 것이 고작 미대생에서 소설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있어 세계관을 설정하는 능력의 부재를 말한다. 미대생이 현실의 열등한 존재를 이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창조자라면 소설가는 현실의 불완전한 사람과 낮은 차원의 세상을 이상적인 존재나 더 높은 차원의 유토피아로 끌어올리는 창조자이다 그런 연유에서 미대생이나 소설가나 근본적인 부분에서 다른 게 없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이 표현하고 전하고 싶은 주제를 하는데 있어 등장인물의 구도가 거기서 거기라면 이 작품의 앞길도 뻔히 보이는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이번에도 연풍이나 여름 전날과 같은 땅을 디디는 인간이 현실에서의 갈망하는 초월적인 그 무엇에 대한 주제를 작품 속에 넣는다고는 장담 못하겠지만 이미 그런 징후가 제목과 선전 문구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특히 관능선생이란 제목에서 관능이란 내재 되어 있는 어감은 상당히 거슬리고 신경이 쓰인다.

 

 

  예를 들면 恋風(연풍)에서의 단어 恋風의 사전적 의미는 연모 하는 마음’(恋心)의 애절함(せつな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마음대로 안 되는 처지를 불어오는 바람이 몸에 스며들어 괴로워하는 하는 모습으로 비유한 단어이다. 이는 코시로와 나노카의 작중의 두 사람의 심정을 암시하는 것뿐 아니라 단어 恋風에서의 (실로 맺어진 운명적 요소)(우연적 요소)를 작품 속에 녹여들어 작가가 전하고 싶은 바를 구사하는데 있어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막힌 짜임새를 보여주었다.

 

  『여름 전날에서 여름의 의미는 열정적 사랑이라는 이야기흐름을 암시하고 아키라에게는 그 남자에게 몰입되는 관계의 시작과 관계의 끝을 테츠오에게는 나약한 자신을 되찾는 계기와 예술의 완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관능선생이란 타이틀은 너무나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작품의 제목은 작품의 주제와 이야기의 진행 방식을 결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인데 작가가 은유적이고 비유적으로 작품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집어넣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물론 작가의 조어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정한 것도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바람과 계절과 같은 자연에서 제제를 따와 제목을 지은 것에 비해 사람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그 인물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전개된다는 것이고 그만큼 이야기를 다채롭게 진행시킬 선택지가 협소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이 관능선생의 불안 요소 중 두 번째 이유인 것이다.

 

 

( 『연풍』-전철 플랫폼에서 첫 만남을 설정했다. 작가는 바람이란 우연적 사건과 나노카를 상징하는 순수함을 벚꽃으로 상징화하여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이라는 정경을  연출했다 이 장면은 이제까지 코시로의 잊고 있던 진실하고 애타는 마음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라는 주제를 전부 담은 그림이다.)

 

 

 

 

(『여름 전날』- 마찬가지로 첫 화에 나온 장면이다. 테츠오를 각성시키는 것은 아키라가 아니라 해바라기를 상징하는 하나미다  해바라기는 초월적 예술에 대한 올곧은 마음과  예술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과 자신의 열등감의 해소를 상징한다. 그렇기에  아키라와의 이별은 필연적인 것이다. )

 

 

 

(「관능선생」-작가는 이번에는 영적성장을 이끌 여성으로 여우를 상징으로 설정했다.   )

 

 

  또한 세 번째 이유로는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여성의 상징성 에 관한 것이다. 작품에서 작가는 남 주인공에게 영적 각성을 시킬 히로인에게 상징성을 부여했다. 연풍에서 나노카는 벚꽃이라는 순결함무구함을 상징하며 코시로의 내면에 잊고 있던 신성한 마음에 대한 각성을 의미한다. 여름 전날에서는 남성을 각성 시킬 상징성을 가진 여자는 아키라가 아니라 하나미로 하나미는 해바라기를 상징한다. 해바라기는 테츠오의 예술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과 열등감의 해소를 상징하며 초월적 예술에 대한 그의 열망을 상징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벚꽃과 해바라기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꽃말이외에 추가로 작가가 정한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관능선생에서는 여우이다. 일본에서 여우의 이미지는 곡식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영물의 상징도 있지만 민속설화에서는 남자를 속이며 현혹시키는 걸 즐거워하는 요물로서도 그려진다. 두 작품에서의 남성의 영적 성장을 그렸는데 관능선생에서는 상징성을 나타내는 히로인이 여우라니 상당히 불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닌게 아니라 선전문구가 나루미 로쿠메이 40이 되어서도 방황하는 인생. 어느 여름날 밤 우연히 이끌린 소설가와 낯선 미녀 그리하여 두 사람이 풀어 낼 광적인 사랑의 기록.”으로 나와 있다. 물론 작가가 설정한 여우의 상징성도 있을 것이고 이것이 추후에 이야기의 방향성과 남성의 성장에 대해서도 충분히 기발한 방법으로 흐를 수 있다. 하지만 제목부터가 노골적이며 편협한 성애를 짐작케 하고 그런 주제를 암시하는 장면이 이야기의 불길한 앞길을 예고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작품을 쓰는데 있어 여우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남성의 영적 각성을 시킬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관능선생의 작품의 주제를 추측하기에 앞서 우선 연풍여름 전날의 포괄적 주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두 작품의 포괄적인 주제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품고 있는 초월적인 것 혹은 마음을 완전히 빼앗으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과 열망이다. 그렇기에 연풍에서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그레첸에 비견하는 몰아적 사랑을 주는 나노카라는 무구한 여성성에 매료되어 애절한 마음을 품는 코시로라는 주인공을 통해 표현했고 여름 전날에서는 자유로운 영혼의 빛을 갈망하는 아키라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작품을 따라가고 단서들을 조합하면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가 도출 되는 것이다. 단순 명료한 제목과 범상치 않는 광적인 사랑의 기록과 그리고 여우라는 여성의 상징성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필자가 낸 결론은 탐미주의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내포한 미의 초월성을 주제로 삼고 싶은 것이 라고 본다.

 

  탐미주의(耽美主義)의 사전적 의미는 광의적 의미로 유미주의로서 미적 향수(享受) 및 미적 형성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인생관 세계관을 가리키며, 에피쿠로스의 이름과 함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근대에 와서 셸링이나 니체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고 한다. 따라서 예술 사조로서의 유미주의는 예술지상주의의 한 지류로서 19세기 후반에 대두되었는데 일본의 탐미주의로 작품을 쓴 유명한 작가는 타니자키 준이치로 나가이 카후 미시마 유키오 등이다. 타니자키의 탐미주의는 유미주의의 일부분으로서 악마주의로 불리며 통속적 도덕과 양식에 저항하면서 관능욕을 추구하기 때문에 강렬한 자극과 인간성을 저버리는 데에서 스릴과 쾌감을 느끼는 태도를 가진다. 라고 한다. 그렇기에 즉, 관능선생에서는 여성의 육체적 관능적 미를 접하고 절대적 미의 초월성을 자신 안에 인식하면서 느끼는 희열과 비현실적인 체험을 통해 소설로 승화시키는 예술의 완성과 이러한 완벽한 예술에 대한 갈망이 주제가 될 것이라고 추측을 해보고 싶다.

 

 

 

 

 

  따라서 프롤로그 첫 회에서 남주가 도도하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히로인의 발을 잡고 신을 고쳐주는 장면에서 발 페티시로도 유명한 타니자키의 마조히스트적인 스멜이 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작품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이번 작품도 인간이 소유하고자하는 비현실의 세계에 있는 존재에 대한 것에 대한 열망이라는 관점에서는 공통된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현실의 저 너머에 있는 논리와 이성의 보편성을 넘어선 무구한 사랑(연풍)이나 영혼을 울리는 초월적인 자유(여름 전날)라는 것을 생각 할 때 충분히 도출 될 수 있는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관능선생에서 타니자키 인생이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서 사회적 양식과 통념을 배반하는 인간관계(불륜 등)를 설정하거나 앞서 언급한 악마주의적인 자기 파괴적 가학적 섹스를 통한 마조히즘적 쾌락을 작품 속에 반영하면서 주인공인 소설가는 완전무결한 예술의 완성에 대한 갈망을 한다. 라는 주제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예상을 해본다.

 

  물론 작가가 이런 타니자키식의 자기 비하적인 혹은 자기 파괴적인 가학적 섹스를 통한 마조히즘적 체험을 통한 사회의 통념을 벗어난 관능적 욕망을 그린다는 보장은 없다. 탐미주의적이라고 해도 꼭 타니자키 식으로 간다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타니자키식이던 그렇지 않던 간에 격렬한 육적관계 그 자체를 예술의 제제로 삼으면서 초월성을 지향한다는 주제는 매우 식상하면서 여름 전날을 재탕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여름 전날도 어떻게 보면 광의적 의미에서 유미주의적인 작품으로 분류 될 수 있고 섹스가 빈번하게 나오기는 하지만 섹스자체는 영혼의 자유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아키라는 '자유로운' 그를  '응시'  하는 것을 원한다. 그를 '응시' 함으로써 그녀는 내면속에 영혼의 울림이라는 '자유' 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적어도 일반 독자들은  작가의 세세한 부분의 변화를 인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 이다.

 

  요시다 모토이의 관능선생2년간의 공백을 깨고 기존의 독자들이 식상하다고 이야기한 미대생 이야기라는 설정을 깨고 소설가라는 다른 세계관을 설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초월적 미의 창조자라는 면에서 같은 것이며 이것은 이야기를 개연성 있게 쓰면서 독창적 세계관을 그릴 역량이 의심되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불안 요소 이다. 그렇기에 작가 자신이 가진 역량의 한계성을 타파하기 위해 혹은 기존 작품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관능선생이라는 협소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 제목의 설정과 팜므파탈적인 여우라는 여성의 상징을 제시한 한 것 이라고 추측이 된다.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타니자키식이라고 의심되는 탐미주의의 기조가 문제 되는 것은 그녀가 이제까지 쌓아 올린 상처 받은 남성의 치유와 그들의 욕망에 대한 이해라는 요시다 작가의 독보적인 세계관이라는 견지에서 매우 위험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상처 받은 남성의 파멸과 그들의 욕망에 대한 몰이해가 이 세상의 주요 담론들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 색깔 없는 군중의 무리로 편입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악마적 탐미주의로 간다는 정황이 확실히 작품 속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앞에서 지적 했듯이 단 하나의 만남의 그림 컷으로 작품의 주제를 은유적으로 그린다고 이야기 했는데 확실히 확증을 하기 위해선 몇 번 더 남녀간의 만남을 가져야하는 것을 보고 판단해야한다.  

 

 

 이러한 '남녀 간의 만남' 에 따른 인물들의 성향이 불안요소의 4번째 이유이지만 여기서는 결론을 낼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직 첫 만남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이며 '여우'와의 우연한 만남역시 해석을 정확히 하려면 '남녀 간의 만남'의  결과를 봐야한다 예를 들면 연풍에서는 첫 만남과 마찬 가지로 두 번째 만남에서도 우연히회사 앞에서 만나 유원지로 놀러 간다. 여름 전날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아키라가 첫 만남(알바하는 테츠오)과 두 번째 만남(풍경화 그리는 테츠오)을 가지고 비오는 날 아키라는 강제키스하고 관계함에서 알 수 있듯이 여름 전날』 에서는 아키라는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분명히 우연의도성이라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건은 작가의 작품의 성격뿐 아니라 주인공의 성향도 담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풍는 우연한 만남을 거듭 할수록 서로에 대하여 코시로의 소극적이며 회피하려는 마음에서 서로의 이끌림을 인식하는 이야기의 전개가 펼쳐지고 여름 전날에서는 아키라의 적극성이 과격한 성애적인내용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관능선생에서는 이러한 두 작품들의 '우연'과 '의도성' 두 요소 전부를 채용할 가능성이 크다. '의도성'에 대해서는 왜냐하면 이 작품의 남주인공은 여타 이제까지 남주인공과는 달리 여유롭고상당히 여성에 대하여 적극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유성적극성은 작가 자신의 구축한 상처 받은 남성의 치유와 그들의 욕망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매우 불안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남녀 간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파악될 때까지 최소 2~3화 정도는 보고 나름대로 판단이 슬 것 이라고 사료 된다. 그것이 앞으로 작품 방향과 주제를 다 축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번에 글을 쓴다면 요시다 모토이의 관능선생이 가지는 불안 요소인 작품의 남녀간의 만남에 따르는 작품의 완성도와 작가의 스토리 전개능력을 예측하여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에 대하여 파악 하고자 한다. 또한 여성의 상징성에 대해서도 추측을 하여 남성의 실존에 대하여 작가가 이제까지 구축해온 세계관을 고수 할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의 주류 담론으로 향할 것인지 알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