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화 라노벨감상

애니 연풍(恋風)과 만화 연풍과의 비교

 

 

 애니메이션 연풍은 20044월부터 617일까지 키즈 스테이션에서 방영했고 원작은 그보다 늦은 200410월에 연재를 마치고 12월에 출판을 했다. 감독은 오오모리 다카히로(大森貴弘), 각본가는 타카기 노보루 (高木登)이다. 애니는 총 13화로 113화로 종료했지만, 지금이야 1쿨이 12~13 정도가 상식이며 정석이지만 2000대 초반까지만 해도 1기가 13화 정도인 것보다는 24화로 구성하는 작품도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심야 시간대 방영 되서 13화로 할 수 밖에 없고 위험 회피(상업적 문제)를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 할 수도 있으나 애니메이션의 주제의 방향성으로 보면 아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13화로 작정하고 만든 것이다. 따라서 원작의 내용의 주제와 결말로 따지고 보면 결단코 후속 작이 나올 수 없는 작품인 것이다. 만약 경제적 문제라서 13=1기로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라면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따라 3권 정도에서 간만 보고 끝나는 설정도 가능했다고 본다. 실제로 독자들 중에서는 원작가가 5권까지 쓰지 말고 3권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좋았다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보아 원작의 주제를 살리는 방향, 즉 코시로와 나노카가 이별하는 장면에서 3권 정도에 끝내 을 본다든가 아니면 그 전에 끝을 내 열린 결말로 하는 등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것을 굳이 원작에도 없는 일화까지 만들어 내어 작가의 진의를 무시하고 작품의 질을 저하시켰다.

 

 

 결론적으로 감독은 원작에서 표현 하고자하는 주제를 무시했고 두 사람의 파국적 결말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통해 원작이 가진 코시로의 내적 치유와, 내면속의 잊고 있던 영원성에 대한 마음의 자각을 나노카를 잊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면서 사회적 금기에 갈등하는 죄의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연모 하는 마음에 대한 영속적 마음을 표현하는 벚꽃이라는 상징성을 무시하면서 슬픔과 애잔한 남매간의 사랑이야기로 전락을 시켜버렸다.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만화에 나오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거나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시청자가 알 수 없는 경제적인 부분이나 또는 내용이 내용이라서 애들(?)이 따라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교훈적으로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감독이 자신이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보고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기교를 부리고 싶다는 호기 어린 마음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감독은 2004년 애니메이션 잡지 7월호 아니메쥬(アニメージュ)에서 결말은 다를지 모르지만 같은 위치에 착지했다고 하면서(結末うかもしれないが位置着地できたと) “두 사람의 앞길은 순탄 하지 않을 것이라 는 의견을 덧붙였다고 한다. 아니메쥬 잡지에서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감독은 작품을 만들면서 원작을 따르면서 자신의 색을 입히려고 한 듯 여겨지나 몇 가지 큰 착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터부라는 형식에 집착한 결과 원작의 의도를 수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서로에 대한 애타는 마음 자체를 집착과 애욕이라는 관점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유야 어찌되든 애니메이션은 여성인 요시다 모토이의 근원적인 상처 받은 존재로서의 남성의 치유와 그들의 욕망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와 반대 되는 방향으로 갔다. 이것은 여성인 원작자는 남성이 품은 고통과 갈망에 따른 죄의식을 긍정하고 이해하는 작품을 쓰고, 남성인 감독과 각본가는 원작자의 작품을 왜곡 훼손시켜 주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이며 이 시대가 가진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몰이해와 무지가 현대대중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런 작품들은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이면서 무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애니메이션 버전)에 대하여 평은 의외로 좋은 편에 속한다. 아마존만가지고 비교를 하면 오히려 일본에 비해 미국 쪽이 호의적 평이 많은 것이 의외라면 의외이다. 물론 그곳(미국 아마존)에 악평을 하는 이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글의 속내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위 말하는 프로불편러로 희화되는 페미나치들로 남성의 존재, 욕망에 악이 받쳐하는 살의와 분노와 적의가 가득한 내용밖에 없다. 이런 사람이 되다만 것들의 입맛에 맞추어 작품을 쓰니, 현대 작품들은 대중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남성들의 기호에 맞춘 남성취향 작품들조차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장르가 액션이든 범죄물이든 가정 혹은 여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통한 남성성의 발현을 강조한 작품들로 채워진다.

 

 

 예전의 작품들은 남성 자신이 가진 위대함 삶을 증명하기 위한 영웅적 행위들은 세계를 바꾸려는 의지로 나타나고, 세상을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는 다시 자신의 영웅적 면모로 드러나는 구조로 주제를 삼은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현재는 그 남성들이 가진 내면의 힘의 상징은 여성을 둘러싸는 세계들, 자신의 위기를 책임지고 난처함을 해결해주는 보호 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남성취향을 빙자한 여성향 작품으로 실상을 따지면 남자들을 기만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그 때문에 작품 속에서는 사랑과 가족애를 부르짖지만, 겉은 그럴듯해 보여도 여성주의적 교조적 감상주의로 진실성이 없기에 그 이면에는 허무와 공허감이 근저에 감돌고 있다. 여성적 세계관을 침해하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남성들과의 양분된 캐릭터 설정으로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불안만이 가득하여, 설령 그 속에서 잠시 감동을 맛본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감을 근저로 하기 때문에, 허무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또 다른 작품을 소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성향이라고 치부되는 작품들 속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기에 모에라는 이상화된 여성성을 주 테마로 삼아 공상을 제공하는 작품들에 빠지는 남성들도 생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애니 연풍에 대해서는 의외로 호의적인 평이 많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원작에서 나노카로 상징되는 벚꽃이 가진 영속적 마음을 작품속의 상징성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코시로의 내면의 치유와 성장의 과정은 봄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표현되고, 유원지라는 공간은 다시 시간과 나노카를 빗댄 벚꽃이 함께 공존하면서 하나의 초월적인 장소를 연출한다. 물론 만화에서 찾을 수 없는 OST 의 훌륭한 완성도와 원작자가 깔아놓은 벚꽃의 상징성이 깊이 가라앉아 되어 시청자들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도 무시하지는 못할 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원작자가 부여한 상징성에 담긴 주제의 내공의 덕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감독은 이러한 맥락을 전부 무시하고 내용을 압축 각색하면서 결론적으로 사회적 터부에 따른 죄책감과 사회적 고립을 주제로 삼아 작품을 만들었다. 이는 원작의 주제가 친남매간의 사랑이 아니라,  원작이 담긴 상징성에 담긴 메시지를 근거로 충실히 작품을 만들었다면, 이해는 못하겠지만 시청자들은 주제가 친남매간의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애니메이션에 대하여 일본 측 반응에는 두 사람의 성장에 대한 의미의 결여됨을, 아쉬워하는 의견을 남기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꽤 있는 것으로 보아 결국 제작자가 생각한 원작의 의도를 살렸다는 생각과는 달리 두 사람의 비관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전개에 따르는 슬픔과 허무만이 감돌뿐이다.

 

 

  다시 감독의 아니메쥬 잡지의 발언으로 돌아가 결말은 다를지 모르지만 같은 위치에 착지했다다는 말과 달리 겉으로 드러난 친남매라는 인간관계에 휘둘려서 원작자의 의도를 이해했다고 보기 힘들며 본질을 놓쳐 버렸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일반 시청자들 또한 호평이든 악평이든 원작자의 의도와 상징성에 대하여 파고든 해석은 보이지 않으며 친남매 간의 사랑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에서 원작가의 의도를 왜곡하여 전달했으니, 그러한 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상징성과 해석에 대하여 다른 점이 무엇인지 살펴 봐야한다참고로  애니메이션에 사용한 번역(sim)lainbule 씨의 번역을 사용한 것을 밝힌다.

 

 

  원작과 애니메이션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주제와 상징성뿐 아니라 세세한 설정들에도 차이가 있다. 우선 작품에서의 시간적 배경은 원작에서는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분명히 1995년도라고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삐삐나 핸드폰이 없는 설정을 하여 대략 적인 시대를 유추하게만 할뿐이다. 그래서 일부 일본의 독자는 원작이 시작된 2001년을 시대 배경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원작에서는 나노카의 나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오빠와 12살 터울이라는 것만 제시된다. 그리고 키타 조연들의 풀 네임이나 세세한 주인공의 배경 같은 것은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면 원작에서 치도리의 풀 네임이나 코시로는 3류 대학의 문학부출신이라는 점 등이다. 그리고 또한 히로인의 나이 역시 고등학생 1학년으로 시작하지만 15세인지 16세인지 명확한 설정은 없다는 점이며 치도리의 풀 네임은 끝끝내 나오지 않고, 코시로의 전공과 대학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들의 구체적인 설정은 애니메이션이 시작하고 나서 공식 홈페이지를 만들고 설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을 만들 때 세세한 부분은 전부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들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또한 애니메이션 버전은 시간적으로는 봄에서 봄으로 딱 1년으로 끝나는 구조임에 비해 원작은 봄이 3번 맞이 하는 약 2년의 시간적인 흐름으로 ,애니메이션의 이야기 구조의 시간 설정이 짧다. 그 이유는 13화라는 구조보다도 파탄이나는 두 사람의 관계라는 이야기 전개를 위해 스피디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헤어지고 코시로의 아파트에 찾아갈 시점은 원작에서는 여름이지만, 각색된 애니메이션에서는 겨울이다. 그렇기에 원작과의 시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있는 것이다. 거기다 원작에서는 헤어진 기간은 반년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한 달 남짓한 기간이다. 이러한 시간적 축소는 두 사람의 감정이 원작이 가지는 오랜 기간의 시간을 들며 숙고하며, 기다리면서 서로간의 마음을 키운다는 설정에 비해, 충동적이며 순간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게 되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원작이 전하려는 주제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에서 전달하려는 사회적 금기에 따른 파멸적인 결말을 내기 위한 것으로 일탈에 따른 사회적 금기를 저지른 두 사람의 순탄치 못한 삶이란 주제를 내려면 나노카의 상징성과 공간적인 상징성(유원지/신사/해변 가)을 급조 내지는 삭제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감독은 원작의 중요 상징성인 나노카가 가진 상징성인 벚꽃흙탕물로 뒤바꿔버렸다. 벚꽃은 나노카를 상징하는 것뿐만 아니라 봄의 시간적인 흐름을 분홍빛 빛깔로 상징한다. 봄의 상징성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시작과 끝(이별) 그리고 완성을 상징하는 시간적인 의미를 가진다. 봄은 벚꽃을 시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코시로의 마음의 변화에 따르는 영적 성장을 나타낸다. 아울러 원작에서의 치유와 영혼의 성장의 장소인 유원지는 일탈적 사랑을 실현해줄 유일한 장소로 갈아치웠다. 그리고 신사/해변 가는 나노카가 현세를 넘어 서는 초월적인 의미로서의 불멸성과 영속적 마음에 대한 상징적 장소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신사/ 태양이 비추는 해변 가가 가진 내세의 불멸적인 의미를 없애고 그 대신, 깊고 칠흑과 같은 어둠과 심연의 절망만이 가득한 부둣가를 설정하여, 두 사람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 결과 나노카를 상징하는 벚꽃과 그 벚꽃이 피는 시기인 봄, 그리고 그 벚꽃이 피어 있는 장소인 유원지는 현실에서의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영속적 사랑의 완성적인 의미를 상징하는 의미는 완전히 어긋나고 일그러져, 버렸다. 벚꽃--유원지는 영속적인 사랑의 완성과 그 빛을 접하면서 펼쳐지는 내면의 치유라는 삼위일체로 이어진다는 의미는 애니메이션에서 철저히 짓이겨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노카를 상징하는 벚꽃흙탕물, 유원지를 철없고 무지한 사랑이 표현되는 유일한 장소로, 신사/해변 가가 가진 공간적 상징을 깊은 어둠과 절망으로 바꾼 결과, 원작과는 상이하게 다른 주제를 담은 작품이 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연풍이 가진 주제가 일반 대중들에게 친 남매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따른 슬픔과 애잔함으로 비출 수밖에 없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듯 애니메이션에서 나노카를 둘러 싼 시간과 공간적 상징성을 뒤바꾸면서 감독이 처음 제시하고자 했던 결말은 다를지 모르지만 같은 위치에 착지했다.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며, 그 결말을 다르게 이끌어내면서 상징성도 다르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주제도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나타난 주제는 서로간의 잊을 수 없는 연정 때문에, 사회적 관계도 파탄이날뿐 아니라, 가슴을 아픈 사랑조차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미친 사랑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두 사람의 사이조차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픔이 잔잔한 수채화처럼 봄빛을 자아내는 정경을 감독은 같은 위치라고 여긴 것이며 원작의 의도를 살린 것이라고 착각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원작에서 상실된 벚꽃--유원지의 상징성과 애니메이션에서 그리려고 한 사회적 금기에 따른 두 사람의 고립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나노카의 상징성은 벚꽃이며 벚꽃은 무구함과 영혼의 순수함이 깃든 꽃으로 코시로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영원성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일깨우면서 따듯하게 하면서 가슴 설레이게 하는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처음에는 원작을 따라가는 듯싶으나 애니메이션 8화에서 나노카와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추가 시켰다. 추가 시킨 부분은 코시로가 나노카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에피소드에서 나노카가 건네준 흙탕물을 안마시고 버린다는 이야기는 존재 하지 않으며 엄연히 애니메이션에서 각색한 이야기이다. 그 때문에 나노카의 상징성인 벚꽃과 그리고 그 벚꽃이 피는 장소인 유원지 그리고 벚꽃이 피는 시기인 봄이라는 요소가 어울려서 두 사람의 영속적 마음의 실천과 완성이라는 의미가 나타나야 하는데, 이와 같은 흙탕물의 의미는 나중에 복선으로 자리잡아 나노카의 상징성을 자리매김 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원작에서 흩날리는 눈을 보면서 나노카=벚꽃임을 회상하는 코시로의 모습이나 유원지에서 나노카에게 첫 만남에서 자신이 치유받은 내면을 고백하는 일화는 사라질 수 밖에 없고, 나노카가 가진 벚꽃이란 의미는 상실되고 대신 흙탕이 가진 오욕과 광기의 의미만 남은 것이다.

 

 

 어린 시절 코시로는 나노카가 준 '흙탕물'을 안 마시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흙탕물'을 기꺼이 마신다. 코시로는 과거의 어린 시절의 나노카가 선의로 준' 흙탕물'과 공원의 어린 아이의 선의로 준 '흙탕물'을 동일하게 여기며 기꺼이 마셔버린다. 그 의미는 지금의 사랑하는 나노카를 상징하는 벚꽃 잎이 담긴 '흙탕물'의 오욕과 사랑을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이다. 그 장면의 상징성은 '흙탕물'은 사람이 먹는 게 못되는, 개나 돼지들이나 마시는 것으로 그걸 먹는다는 건 이미 사람이길 포기 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감독은 인간의 길에서 벗어났다는(れる) 대사와 함께 거울에 비취는 코시로 자신의 초췌하고, 넋이 나간 모습을 나타나는 장면을 집어넣은 것이다. 따라서 나노카의 상징성은 연모의 상대이면서 동시에 오욕의 상징이며 그 양면적인 존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의 도리에서도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노카와 다시 재회하는 시점에서, 코시로가 장을 보러 갈 때 그리는 그의 이미지는 사회에서 일탈된 폐인적인 몰골에 중점적으로 묘사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러한 광인혹은 미친놈으로서의 코시로의 변화는 인간에서 짐승으로의 축생의 길로 전락과 사회적 고립과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작에도 없는 회사에서 퇴직하는 장면과 퇴사하면서 치도리가 질책하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원작에는 코시로는 여전히 회사 잘 다니고 동료들로부터 신뢰도 받는다. 물론 원작에서도 치도리의 질책은 있으나 간접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이지 직접적으로 네 인생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원작에서는 벚꽃을 바라보는 코시로의 심상을 중점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사회적 고립이라는 의미는 희석되고 내면의 구원과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던 진정한 마음의 실체에 대하여 체득한 표정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중요한 원작과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벚꽃의 상징성을 '흙탕물'로 바꾸면 봄이 가진 상징성도 퇴색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노카가 가지는 오욕이면서 연모의 대상으로 상징되는 '흙탕물'과 그것 수용하는 광인으로서의 코시로 라는 이야기 구조는 1년이란 기간 동안 걸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원작의 3년이라는 기간과 달리, 1여년이라는 기간 안에 전부 일어나게 그려야 하므로, 원작의 을 맞이하면서 '만남과 이별' 을 거듭하며 벚꽃 잎의 색감처럼 내면의 성숙함도 깊어지는 심상세계는 자연스레 삭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봄은 '벚꽃(=나노카)' 를 '시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봄이 와야 벚꽃이 피어나듯이 벚꽃이 가지는 영속적 마음에 대한 초월적 믿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순수하고 무구한 꽃이 피어나는 장소인 유원지는 코시로가 치유 받는 장면은 자신의 내면에서 퇴색된 빛을 채색하는 과정과 시간적으로 성숙되는 모습을 봄이라는 계절을 통해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애당초 나노카를 '흙탕물'로 설정을 하여 원작에서 나노카를 벚꽃으로 비유하고, 벚꽃을 시간적으로 표현한 봄이 가지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지 못한 것이다. , 코시로가 느끼는 애타는 마음에 대한 상념의 '성숙도의 깊이'가 엿볼 수 있는 시간적 전개라는 개연성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에서는 원작의 봄이 가지는 벚꽃이 가진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봄의 끝은 다시 새로운 시작이면서, 영속적 사랑을 깨닫고 실천이라는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봄->()->(시작과 완성)의 '연속적' 구도에 비해, 애니메이션에서는 단절적이고, ->봄 이라는 '단발적' 인 구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에서 봄의 의미는 애타는 마음의 성숙과 그 사랑의 완성을 향해 진행된다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의 가련하고 애달픈 사랑이라는 슬픔만이 감돌뿐이다. 그러한 봄의 전체적인 색채는 안타까운 슬픔이 들어간 벚꽃 빛으로 수를 놓고 있으며, 진흙탕으로 범벅이 된 두 사람을 향해서 앞으로 벌어질 사회적 고립과 비극을 암시하며, 애처롭게 비출 뿐이다.

 

 

(1화)

 

 

 

(13화)

 

 

 그렇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서의 유원지의 의미도 변질 될 수밖에 없다. 애니메이션에서 유원지가 의미하는 상징은 현실과 유리된 초월적인 장소이며 사회적으로 용인 될 수 없는 사랑을 꽃 피울 유일한 장소이다. 그 사실은 1화의 코시로의 독백과 마지막 13화의 두 사람의 대화에서 유추 할 수 있다. 이러한 1화와 13화의 독백과 대화는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것으로 감독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화에서 코시로가 말하는 여기유원지이다. , 벚꽃이 피는 '비일상적 공간' 이며 현실과 고립되며 가능성이 없는 사랑이 실현 될 유일한 장소인 것이다. 이에 대한 복선은 13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13화의 두 사람의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의 실현의 소망을 신에게 비는 장면이 나온다. 한 순간 관람차가 움직이는 듯 보이나, 또 다시 소원을 빌 때는 관람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유원지라는 장소, 유원지라는 공간은 두 사람의 애달픈 사랑에 따른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동화 속과 같은 몽환적인 심상을 표현하면서 달콤한 꿈에 취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 마저도 이루어 질 수 없는 애처롭고 슬픈 정경을 마지막 봄의 벚꽃이 흩날리는 허무와 아련함만이 감도는 공허한 장소로 탈바꿈 시켰다. 공허한 마음을 안고 감미로운 환영만을 보여주는 사회적인 일탈의 장소인 것이다.

 

 

 한편, 앞서 설명했듯이 애니메이션에서는 봄은 두 번만 나오는 봄->봄 구조이다. , 두 번째 봄, 그것이 작품의 끝이다. 원작처럼 또 다른 시작과 완성으로서의 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두 사람은 유원지가 폐장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년에 또 오자는 기약 함께 쓴 우산’(アイアイ)을 나무에 세기며 다음 번 봄에서의 만남을 약속하지만, 잔인(?)하게도 유원지를 폐쇄시키는 사람이 두 남매의 아버지라는 설정을 했다. 이것 역시 원작에서는 없는 일화이다. 이로서 유원지는 폐장되고 두 사람의 일탈적이며 불가능한 맹세를 이루어 줄 유일한 안식처로서 장소는 사라지고 사랑의 언약으로서의 약속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원작에서도 유원지는 폐장이 된다. 하지만 원작에서 두 사람은 폐장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며, 하물며 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폐장시킨다는 설정은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원작에서도 비일상적인 공간으로서의 의미는 있으나, 애니메이션처럼 두 사람의 사리 분별없고, 불장난에 가까운 공허한 사랑이 실현되는, 언젠가 스러질 운명을 겪는 허무의 장소로 그리지 않았다. 원작에서 유원지 폐장의 의미는 '허무하지 않는 존재‘, , 벚꽃이 지니는 영속적 마음에 대한 두 사람의 믿음과 실천을 결심하는 장소로 나타난다. 그래서 유원지는 애타는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불멸성'에 대하여 서로 같은 각오로 살아가겠다는 결의를 상징하는 '공간적 의미'를 지닌다. 원작이 가지는 유원지의 공간적 의미는 코시로의 퇴색되고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체온을 느끼게 하는 치유의 장소이자,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영원함을 맹세하고, 실천하는 허무가 아니라 완성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감독은 유원지를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꿈의 공간으로 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고,  그 감미로운 동화책의 페이지를 덮음과 동시에 꿈도 깨어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결국, 감독은 나노카의 상징성인 벚꽃을 흙탕물로 변화 시키면서, 순차적으로 벚꽃이 피는 봄의 의미와 벚꽃이 피는 장소인 유원지의 의미마저 변하게 된 것이고, 결론뿐만 아니라 감독이 살렸다고 생각하는 원작자의 의도마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마치, 감독 자신이 만든 에피소드 13화의 마지막 두 사람이 내년에 또 만나지며 나무에 세긴 함께 쓴 우산 ’ (アイアイ)처럼 작가와 감독의 마음은 서로 만날 수 없게 된 것과 같다. 또한 유원지뿐만 아니라 신사/해변 가가 상징하는 공간적 의미에서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원작에서 신사/해변 가를 칠흑과 적막감만이 감도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부둣가'로 공간적 의미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신사/해변 가는 나노카가 존재하는 현세에서 내세(신사/해변 가)로 이행하는 불멸적인 사랑의 마음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노카가 신에게 소망하는 신사에서 붉은 태양이 비추는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사에서  해변 가를 배경으로 이행하면서 코시로에게 내세를 맹세한다는 설정은 서로에 대한 애타는 마음의 '불멸과 영원함' 을 나타내면서 나노카를 상징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부둣가'이어지는 도로를 걷는 두 사람의 정적감은 암울하고 음울한 미래를 암시하면서, 이따금씩 스쳐지나가는 차 소리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그들의 고립된 마음을 전달 할 뿐이다. 이렇듯 애니메이션에서는 도로에서 마지막  '부둣가'로 이어지는 공간적 설정을 하였고, 마지막 동반자살을 암시하는 나노카의 말은 현실을 초월한 무한한 연정에 대한 의지라기보다, 현실에 지친 공허와 짙고 막막한 미래에 대한 상실감에 대한 절망에 가까운 마음만이 느껴질 뿐이다. 이와 같은 적막한 도로->어둠이 짙게 깔린 이와 같은  '부둣가'의 설정은 감독이 신사/해변 가가 지니는 의미를 이해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도로-> '부둣가'의 설정이 나타내고 전하는 의미는 설령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해도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삶은 죽음의 칠흑과 같은 깊은 바다의 심연처럼 가늠하기 힘든 미래와 두려움만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사랑이 실현되는 유원지는 사라지고 허무의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나노카의 불멸적인 사랑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하는 신사/해변 가는 부두 가로 바뀌어 현실에서의 상실감과 깊은 절망감만을 나타나게 된 것이다. 허무와 몽환으로서의 유원지와 상실과 절망감의 '부둣가' 라는 공간적 의미는 자연스럽게 현실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사회적 고립과 사회적 금기를 어긴 죄책감과 쓸쓸한 슬픔만을 남기는 것이다. 따라서 감독은 마지막 13화에 앞서 언급한 코시로의 퇴사와 치도리의 질책이라는 원작에도 없는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것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직장 상사와 동료직원과도 소통하며 원만하게 적응을 해나간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에서의 코시로의 사회적 소외와 고독을 표현하기 위해 부모님 이름이 새겨진 문패에 사죄하는 에피소드를 첨가 했다. 결국, 애니메이션의 치도리의 앞으로 잘 되겠냐는 말은 코시로의 미래이고 두 사람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미래는 13화 진흙투성이의 두 사람의 헤어지는 모습으로 연출 되는 것이다. 원작에서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유원지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나노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나노카의 웃는 얼굴로 매듭짓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코시로가 같이 목욕 하러 돌아가자는 말에 나노카는 거부하며, 나노카의 뒷모습을 보고 사랑해라고 되뇔 뿐이다. 원작에서 만발하는 벚꽃 잎의 색채는 사랑의 완성이자 영원한 애타는 마음의 체득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그저 쓸쓸하고 아련한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의 안타까움만이 느껴질 따름이다.

 

 

 

 

 이렇듯 현실에서 그들에게 남겨진 건 이룰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의 슬픔과 그 슬픔에 따른 죄책감, 그리고 사회적 소외이다. 그래서 감독은 그러한 사회적 소외라는 의미를 연출하는 방법으로 나노카에게서도 친구와의 사이가 서먹해지는 장면을 집어넣은 것이다. 친구와의 사이도 멀어지면서 나노카는 현실에서 소외된다. 이와 같은 나노카의 소외는 후타바라는 친구와의 관계로 표현된다. 나노카가 후타바 집에 잠시 머무르는 에피소드로 나노카를 상징하는 흙탕물의 복선으로서 나오면서, 앞으로 두 사람의 미래를 암시한다. 여기서 후타바의 언니가 결혼의 현실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원작에서는 없는 장면이다. 후타바의 언니의 단순히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은 애니메이션에서 나노카가 상징하는 흙탕물의 의미와도 일치한다. '흙탕물'을 코시로가 받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는 오욕과 나노카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흙탕물을 마시면서 광인이 되어 사회와의 접점도 사라지고 퇴색해 갈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코시로에게 달콤한 독배를 주는 나노카는 사회적 금기를 무시하고, 사리 분별없는 사랑으로 맹목적인 마음을 나타내는 히로인으로서, 그 마음은 서로에게 세상에서 멀어지게 될 뿐 아니라, 함께 같이 있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연풍 4권 P,169~170

 

 

 그러나 원작에서도 결혼의 현실의 이야기가 들어가는데, 코시로가 맡은 고객인, 포목점(呉服屋)을 물려받는  맞선고객과의 이야기로 나타난다. 하지만 전달하려는 의미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애니메이션의 결혼의 현실에 대하여 포목전을 물려받는 남자가 하는 말은 자신이 앞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의 상실과 가정에 치여, 평범한 삶의 전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만 보면 애니메이션에서의 결혼의 현실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서 후타바 언니의 고민을 통해 나노카가 가진 특성, ‘흙탕물이라는 상징의 복선이 되는 설정을 한 것에 비해, 원작에서는 맞선고객의 말에서 결혼에 대한 남성이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 또는 커리어의 희생을 통해 얻는 가정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코시로가 연모하는 마음의 초월성, 그 마음 자체를 위해 살기 위해, 독신을 결심하는 코시로의 고고한 희생을 나타내는 것에 차이가 있다. 따라서 코시로는 사랑에 대한 영속적 마음그 자체와 결혼을 한 것이고, 그 영속적 애타는 마음을 상징하는 신부로서, 나노카라는 상징과 결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풍 5권 P,194~196

 

 

  따라서 최종적으로  애니메이션에서 흙탕물로서 상징되는 나노카의 모습은 반쯤 혼이 나간 들뜬 표정으로 표현되고, 결국, 친구들과의 모임을 거절하면서,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결말로 맺어짐을 암시하고 있다. 이때 후타바가 나노카의 비밀을 어렴풋이 눈치 채는 장면이 있다. 비밀을 눈치 채면서 앞으로 단짝인 나노카와 사이가 멀어진다는 의미를 부여 한 것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던지 아니면 후타바가 느낀 불쾌한 감정은  나타나지 않는 사실이다. 오히려 원작에서는 나노카가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후타바의 독백으로 끝맺고 있다.

 

 

  애니메이션 연풍은 감독의 생각과는 다르게 결말만 다를 뿐 아니라 원작의 진의도 반대로 전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우선 감독은 나노카의 상징성을 벚꽃이 아닌 흙탕물로 상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에서 벚꽃--유원지의 구도는 깨져버렸고, 흙탕물로서의 오욕과 광기가 깃든 사랑이라는 양면적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나노카, 그 나노카라는 흙탕물을 주저 없이 마신 코시로는 광인내지는 인간의 길을 벗어난 축생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봄이 가진 의미는 원작이 나타내는, 봄의 끝은 다시 새로운 시작이면서 영속적 사랑을 깨닫고 실천이라는 완성이라는 의미가 사라져, 봄에서 봄으로 끝나는 단발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단발성은 두 사람의 을 암시하며 두 사람의 가련하고 애달픈 사랑이라는 슬픔은 전체적인 봄의 색채로 채색되어 안타까운 슬픔이 들어간 벚꽃 빛으로 수를 놓고 있는, 이러한 서로가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두 사람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봄의 정경을 감독은 같은 위치에 착지 했다.” 고 하는 것이며, 원작의 의도를 살렸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서 유원지의 의미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랑을 이뤄주는 동화 속 같은 미몽의 달콤한 꿈에 취해 보이는 장소로 나타나고 , 그 장소가 폐기되면서도, 그 사실조차 모른 채, 꿈을 꾸는 애처롭고, 슬픈 정경을 마지막 봄의 벚꽃이 흩날리는 허무와 아련함만이 감도는 공허한 장소로 탈바꿈 시켰다. 이러한 봄과 벚꽃이 피는 유원지가 가지는 공허감과 사랑의 허무한 슬픔만이 감도는 정취를 작가의 의도라고 본 것이며, 결말이 다르더라도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왜곡은 부둣가에서도 나타나며, 원작에서 신사/해변 가는 나노카가 현세에 대비 되는 초월적인 의미로서의 불멸성과 영속적 마음을 나타내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그 대신, 깊고 칠흑과 같은 어둠과 심연의 절망만이 가득한 부둣가를 설정하여 두 사람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할 뿐이다. 미래에 대한 어둡고 깜깜한 밤과 같은 암울함은 두 사람의 미래이며, 봄이라는 화사함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어두운 두 사람의 미래임과 동시에, 흙탕물로 치환된 나노카가 가진 또 다른 속성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원작과 달리 두 사람의 어둠과 같은 암울한 미래는 사회적 소외로 연출했다. 코시로는 퇴사를 하고, 새 직장을 잡지도 못했으며, 나노카는 친구들과 소원해지고, 가장 친한 후타바에게서도 멀어지게 된다. 결국 나노카의 상징성을 '흙탕물'로 설정하면서, 원작이 가진 무구함과 영속적 마음이란 것을 무시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원작에서 봄과 유원지의 상징성도 필연적으로 어긋나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어긋남은 두 사람의 사회적 고립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두 사람의 애욕과 집착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되면서, 코시로의 죄책감과 고독이라는 깜깜한 심적 어둠이 감상적으로 화사한 봄의 정경에 녹아들면서, 밝고 경쾌함과 막연한 불안이 스며든 가슴 먹먹한 어렴풋한 비애를 자아낸 것을 원작의 의도와 취지를 나타낸 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