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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라노벨감상

영화 귀를 기울이면(1995)-"컨트리 로드" 고향의 의미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면(をすませば)이라는 작품은1989년에 집영사(集英社)의 잡지 리본(りぼん)에 게재된 히이라기 아오이(あおい)의 연재만화를 원작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감독은 지브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해 온 곤도 요시후미(近藤喜文)로 생애 첫 감독으로서의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곤도 요시후미는 우리가 잘 아는 빨간 머리 앤에서 작화감독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고 미래 소년 코난에서 원화를 담당했다. “귀를 기울이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는 각본을 쓰고 스토리보드(コンテ)를 작성했다.

 

  영화 귀를 기울이면(1995년)은 묘한 작품이다. 형식적으로 따지면 감독을 맡은 곤도의 작품이지만 각본을 쓴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감독이 총사령관이라면 각본가는 책사정도라고 비유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본가는 감독이 원하는 이야기를 쓰는 역할이고 전체적인 스토리는 감독의 몫이다. 보통 협의 단계에서 감독과 생각이 다르면 작품을 쓸 수 없다. 즉, 감독이 "갑" 이고 각본가는 "을" 의 입장이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각본을 쓴 미야자키가 주체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애매한 포지션 때문인지 논문 포탈 사이트 “RISS” 에서 전체적인 회사가 주체가 되는 지브리의 작품으로 혹은 넓은 개념에서의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있어도 미야자키 단독의 작품으로 해석한 논문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것은 미야자키가 감독을 밑은 마녀 배달부 키키와 비교해도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마녀 배달부 키키도 원작이 존재하고 미야자키는 원작을 근거로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아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마녀 배달부 키키는 원작이 존재해도  감독을 맡았기 때문에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인정되며, 이에 따르는 논문도 나온다.

 

  물론, 지브리=미야자키 자체 브랜드가 되어 실질적인 알력을 행사하니 미야자키 작품으로 봐야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우선 형식상으로 시비는 가려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필자가 미야자키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는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중심 주제에 대하여 미야자키가 관여 하지 않고 숟가락만 얻었다고 생각 되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이면에서의 핵심 주제로 커다란 중심 이야기의 구성을 이루는 이야기는 우연히 바론이라는 고양이 남작과 시즈쿠라는 소녀와의 만남과 그 만남에서 소녀는 자신을 둘러싼 안정된 일상에서 신비롭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별세계의 세상을 바라본다는 설정이다. 이 세계를 잇는 문을 통과하고 그곳에서 겪는 소녀의 성장을 나타내는 "귀를 기울이면"에서 받은 영감은 그 후의 작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작품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라는 작품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에서 미야자키는 현실과 이세계를 통과하는 문을 설정하고, 이세계를 지나가면서 겪는 사건과 위기를 통해 새로운자신의 내면의 세상을 만나는 일화는 작품의 곳 곳에서 보여진다. 이러한 "이세계와의 우연한 조우"는  원작에서 히이라기가 설정한  훌륭한 만화의 설정이고 여기에 미야자키는 매료되어 영화화를 결정했다고 보여 진다. 2회 정도 연재에서 미야자키가 작품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지하철에서의 우연한 고양이와 소녀와의 만남으로 그 고양이에게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매혹적인 이세계인 지구옥(地球屋)이라는 만물상을 통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관이 변화 하며 성장하는 것을 나타내는 에피소드 이외에는 생각 할 수 없다.

 

         시즈쿠:어디 가니? 밖은 재미있어? 얘- 대답 좀 해 우리 집에 올래?

 

 

  그런데 여기서 원작과 달리 소녀의 세계관이 변화 하는 것에 미야자키는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부여했다. 그것은 소년 소녀들의 청소년기에 가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꿈에 대한 소망을 원석으로 비유했고 그것을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들어 눈부신 광채로 만드는데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이며, 그 메시지를 축약시켜 감독이 전하려는 영화의 긴 주제를 녹여든 것이다. 바로 그 유명한 "컨트리 로드"라는 노래이다. 마치 원석과 같은 오리지널의 가사를 갈고 닦아 영화를 빛나게 한 것으로 영화의 엔딩 크리딧에 흐르는 컨트리 로드의 번안 곡이다. 하지만, 그 번안 곡조차도 미야자키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다. 어찌된 일인지 처음에는 자신이 맡아서 "컨트리로드" 번안 곡을 쓰려고 했는데 잘 안 되어 귀를 기울이다의 프로듀서를 담당하고 있는 스즈키 토시오(鈴木敏夫)의 딸 스즈키 마미코(鈴木麻実子)에게 콘트리 로드 해석을 맡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야자키는 영화의 중심 이야기에서 소녀와 고양이의 만남과 성장으로 이어지는 부분과 그 성장을 은유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컨트리 로드라는 곡의 번안을 미야자키가 관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소녀와 이상한 고양이와의 만남 그리고 그 신비한 세계에서 소녀는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벗어나 인식의 확대를 체험한다는 설정과 소녀가 확장한 인식의 변화를 이끈 동화 속 세상의 주인인 고양이 바론의 눈에 담긴 광채의 상징은 전부 원작에서 빚진 것이다. 아울러 영화에서 고양이 눈의 광채의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가사인 "컨트리 로드"조차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귀를 기울이면은 흥행에 성공하여 84일간 18.5억엔의 수입을 올렸고 2088967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또한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이야기의 각본의 완성도 가지고만 성공하지 못하며 미야자키가 곤도를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감독이란 직책을 맡긴 것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지브리라는 미야자키의 브랜드가 있고 그 영향력 아래서 자신은 일선에서 약간 물러나 있는 것에 불과하니, 참으로 애매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곤도 감독의 작품으로 지브리라는 회사의 미야자키의 색채가 들어간 작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아닐까 본다.

 

 

  그렇다면 귀를 기울이면이 미야자키의 색채로 덧칠해졌다면 어느 부분에서 어떤 사고방식으로 색을 입혔는지 살펴 봐야한다. 앞서 설명 했듯이 이 작품의 흐름을 이루는 두 가지 중심 소재는 소녀와 고양이의 만남그리고 컨트리 로드이다. “소녀와 고양이의 만남에 대한 해석은 원작과 영화와의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 소녀와 고양이의 만남의 해석의 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지면을 할애해 원작과 영화와의 차이에 대하여 자세히 다룰 것이다.

 

 

  컨트리 로드[Take Me Home, Country Roads ]1971년에 빌 다노프(B. Danoff) · 타피 나이버트(T. Nivert) · 존 덴버 등 세명이 합작한 망향의 노래로, 같은 해 봄부터 존 덴버의 레코드가 히트하여 빌보드에서 8월에 2위까지 상승하면서 밀리언셀러가 된 곡이다. 가사의 해석은 팝스 잉글리시의 부지영의 해석을 참고로 했다.

 

http://www.voakorea.com/a/a-35-2007-10-22-voa26-91301264/1311850.html

 

(1)

 

Almost heaven, West Virginia

천국 같은 곳, 웨스트 버지니아

 

Blue Ridge Mountains, Shenandoah River

블루리지 산맥과 셰난도아 강

 

Life is old there, older than the trees

그 곳의 삶은 오래 됐죠, 나무 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Younger than the mountains, growin’ like a breeze

산 보다는 어리고, 산들바람 처럼 자라나죠

 

Country Roads, take me home

시골 길,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요

 

To the place I belong

내가 속하는 그 곳으로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웨스트 버지니아, 산골 여인아

 

 

Take me home, country roads

날 고향으로 데려다 줘요, 시골 길이여

 

(2)

All my memories gather round her

내 모든 추억은 그 여인에게 모이죠

 

Miner’s lady, stranger to blue water

광부의 아내, 바다를 모르죠

 

Dark and dusty, painted on the sky

어둡고 먼지 낀 하늘

 

Misty taste of moonshine, teardrop in my eyes

위스키의 흐릿한 맛, 내 눈의 눈물방울

 

(3)

 

I hear her voice in the mornin’ hour she calls me

아침에 날 부르는 그 여인의 목소리를 들어요.

 

The radio reminds me of my home far away

라디오를 들으며 먼 곳의 내 고향을 떠올리죠

 

 

And drivin’ down the road I get a feelin’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문득 생각하죠

 

That I should have been home yesterday, yesterday

진작에 고향에 내려갔어야 했다는 걸

 

Country Roads, take me home

시골 길,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요

 

To the place I belong

내가 속한 그 곳으로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웨스트 버지니아, 산골 여인아

 

Take me home, country roads

날 고향으로 데려다 줘요, 시골 길이여

 

Take me home, now country roads

지금 날 고향으로 데려다 줘요, 시골 길이여

 

Take me home, now country roads

지금 날 고향으로 데려다 줘요, 시골 길이여

 

 컨트리 로드의 원곡이 가지는 의미는 웨스트 버지니아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주인공이 힘든 타향살이에서 지친 심신을 따스히 맞아주는 정겨운 시골로서 묘사된다. 웨스트 버지니아가 가지는 고향의 의미는 어머니 같은(mountain momma) 혹은 여인의 품은 주인공이 과거 가진 따스한 추억의 상징이며, 그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들뜬 마음이 향하는 장소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산골 고향 길로 이어지는 컨트리 로드는 자신이 있던 고된 기억만이 있던 세상과 따스하고 포근한 추억이 있는 시골정경이 있는 장소의 징검다리로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원곡을 번역한 일본 판 번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일본 판 번역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 맥락은 한국어번역과 차이가 없다.

 

 

1983년 6월 9일 존 덴버와 미나미 고우세츠(こうせつ)와의 듀엣

 

  일본어 번역도 한국어 번역과 마찬가지로 타지에서 지친 자신을 반갑게 맞이 해주는 심적인 안식처로서의 고향으로 웨스트 버지니아로 상징되며 그곳에서 기다리는 연인은 타지의 험난한 삶을 모르는 때 묻지 않은 여인으로서 자신의 있어야할 근원을 나타낸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에 나오는 "컨트리 로드"의 의미는 정반대이다.

 

  미야자키는 원곡 "컨트리 로드"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대체, 요즘 중학생에게 고향의 의미는 뭘까? (いったいいまの中学生にとって故郷とはなんだろう)”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중에 컨트리 로드를 번역하는 소녀 시즈쿠가 등장하게 된 것이고, 이야기 흐름과 주제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원래, "컨트리 로드"의 번역은 미야자키가 하려고 했으나 좀처럼 가사가 써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고심 하던 과정에서  미야자키는 시즈쿠가 노래하는 장면의 프리 스코어링(pre scoring- 애프터 레코딩과 반대되는 용어로 성우가 먼저 녹음을 하고 사람의 입모양에 맞추어 동화를 만들어가는 제작 방식)을 서둘러 마쳐야하는 시기가 다가와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의 딸에게 맡기는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스즈키 토시오는 1989년 지브리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 제작 보조를 시작으로 지브리   대다수의 작품에 프로듀서로 담당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의 컨트리 로드 가사를 번안한 스즈키 마미코는 작중의 시즈쿠와 같은 나이대의 소녀로 스즈키 토시오의 딸이다. 스즈키는 미야자키의 제안을 듣고 망설였지만 시간이 없어서 딸에게 의뢰를 하니 당돌하게 얼마 준데?(ギャラいくら)” 언제 마감 하는데?”(りはいつ) 라고 되받아 쳤다고 한다. 이렇게 의뢰 성립이 되었으나 마감 당일까지 완성을 못했다고 한다. 마감 당일 오전 1시까지 집에 안 들어 온 딸을 잡아서, “오늘까지 마감이야라고 하니, “알았어, 지금 할께라고 하면서 가사 번안에 집중 하더니, 5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작중의 시즈쿠의 내면의 성장을 나타냄과 동시에 세이지의 사회의 첫발을 내딛는 길을 상징하는 컨트리 로드가 완성 된 것이다.

 

 

 

 

 

カントリー・ロード

컨트리 로드

 

カントリーロード この ずっとゆけば

칸트리 로드 고노 미치 줏토 유케바

컨트리 로드 나의 길을 줄곧 걸어 나가면

 

あの つづいてる

아노 마치니 츠즈이테루

저기 보이는 마을로 나아가는

 

きがする カントリーロード

키가 스루 칸토리 로드

느낌이 들어 컨트리 로드

................................................................... 

 

 

 

ひとりぼっち おそれずに

히토리 봇치 오소레즈니

혼자가 된다는 것, 두려워 말고

 

きようと みてた

이키요우토 유메미테타

살아가려고 꿈을 꾸었지

 

さみしさ めて

사비시사 오시코메테

쓸쓸한 마음 감내하고서

 

自分っていこ

츠요이 지분오 마못테이코

강한 자신을 지켜나가야 해

 

カントリーロード この ずっとゆけば

칸토리 로드 고노 미치 줏토 유케바

컨트리로드 나의 길을 줄곧 걸어 나가면

 

あの つづいてる

아노 마치니 츠즈이테루

저기 보이는 마을로 나아가는

 

きがする カントリーロード

키가스루 칸토리 로드

느낌이 들어 컨트리 로드

 

 たたずむと

아루키츠카레 타타즈무토

걷다 지쳐 멈춰 서면

 

かんで 故郷

우칸데쿠루 후루사토노 마치

떠올라 오는 고향 마을

 

をまく 

오카오 마쿠 사카노 미치

언덕(봉우리)을 돌아가는 고갯길

 

そんな っている

손나 보쿠오 시캇테이루

그런 자신을 질책하고 있어

 

カントリーロード この ずっとゆけば

칸토리 로드 고노 미치 줏토 유케바

컨트리로드 나의 길을 줄곧 걸어 나가면

 

あの つづいてる

아노 마치니 츠즈이테루

저기 보이는 마을로 나아가는

 

きがする カントリーロード

키가스루 칸토리 로드

느낌이 들어 컨트리 로드

 

どんなけそうなだって

돈나 쿠지케소우나 토키닷테

아무리 주저앉고 싶어질 때라도

 

して せないで

켓시테 나미다와 미세나이데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마

 

なしか 歩調くなっていく

고코로나시카 호쵸가 하야쿠낫테이쿠

기분 탓인지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지네.

 

 すため

오모이데 케수타메

추억을 지우기 위해

 

カントリーロード

칸토리 로드

컨트리 로드

 

この 故郷へつづいても

고노 미치 후루사토에 츠즈이테모

이 길이 고향으로 이어진다 해도

 

 かないさ

보쿠와 이카나이사

나는 가지 않아

 

けない カントリーロード

이케나이 칸토리 로드

갈 수 없어 컨트리 로드

 

カントリーロード

칸토리 로드

컨트리 로드

 

明日 いつもの

아시타와 이츠모노 보쿠사

내일은 평소의 나 자신이기에

 

りたい れない

카에리타이 카에레나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 갈수 없어

さよなら カントリーロード

사요나라 칸토리 로드

잘 있어요. 컨트리 로드

 

 

 

 

  스즈키의 딸 마미코가 완성한 번안 가사의 초안은 원작과는 달리 마치 가출 청소년(!?)이 당당하게 집을 터나 타향살이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원작 가사에서 풍겨지는 고향이 가진 타지에서 상처 받은 자신을 품어주는 회귀의 장소로서의 의미는 완전히 뒤집어져, 한때 추억의 장소이지만, 새로운 자신으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부담스러운 장소에 불과하며, 설령 자신에게 고향으로 가는 선택을 준다 해도 절연해야만 하는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원작에서의 언제나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정겨운 장소가 아닌 과거와 자신과 미래의 자신이라는 양분된 의미의 장소로서 돌아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새로운 자신을 만나가기 위해 떠나야만 하는 이별의 장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미야자키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해 좋아(よし)”라고 하면서 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사의 채택 안을 둘러싸고 감독인 곤도 요시후미와 미야자키 하아오와 격론이 벌어지게 된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번역의 한 소절을 둘러싼 논쟁이다. “컨트리 로드의 가사의 첫 소절- 혼자가 된다는 것, 두려워 말고 살아가려고 꿈을 꾸었지 (ひとりぼっち おそれずきようと夢見てた)는 사실 미야자키가 나중에 고친 것이다. “컨트리 로드의 한 소절의 초안은 아래와 같다.

 

 

ひとりできると たずに まちをびだした

혼자서 살아가려고, 아무 것도 없이 마을을 뛰쳐나갔지

 

  즉, 위의 가사는 스즈키의 딸이 처음에 번안한 곡으로 미야자키에 의해  혼자가 된다는 것, 두려워 말고 살아가려고 꿈을 꾸었지" (ひとりぼっち おそれずに きようと 夢見てた) 로 고쳐진 것이다. 그러나 곤도 감독은 원래 가사가 더 좋다는 주장을 하였고 미야자키 역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로 논쟁을 하던 중 나중에는 고성이 오고가는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곤도가 뜻을 굽혔지만, 이러한 두 사람의 불화로 인해 곤도와 미야자키의 파벌로 나눴다느니 이 때문에 미운 털이 박혀 아예 그 이후로는 감독을 안 시켰다느니 하는 확인이 불가능한 말들이 나올 정도의 격론이었다. 나중에 전국 캠페인 중 센다이(仙台)에서 두 사람이 식사를 할 기회가 생겨, 곤도 감독은 겨우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고 한다. “저는 지금도 원안이 더 좋다고 생각 합니다.” 라고 운을 떼면서, “ 제 자신, 만화가가 되려고 집을 나와 도쿄로 상경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僕自身漫画家になろうと家出するように東京てきました本当っていなかった……)” 라고 눈물을 흘리며 털어 놓았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 필사적으로 애니메이터가 되었으나 그 정도 가지고는 고향으로 돌아 갈수 없다.” , 진정한 의미의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감독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드디어 고생 끝에 당당히 자신에게 가슴을 피고 내놓는 첫 작품의 주제곡이 자신의 인생 그 자체가 담겨있으니 어지간해서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본다.

 

 

  곤도 감독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만화가가 되려는 일념하나로 상경한 자신의 인생과 작품 속의 세이지의 결심을 나타낸 컨트리 로드의 원본 가사에 대한 세이지의 삶은 곤도 감독의 인생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집착했었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삶에서의 접점을 찾기 힘들어 와 닿지 않았으니 너무 노골적으로 보인 것이다. 마치 가출 청소년이 집을 떠나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 갈수 없다는 의미로 밖에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즈키의 딸이 번역한 초안과 나중에 미야자키가 고친 최종 완성 버전과 비교해 볼때,  초안이 더 좋았다고 하는 곤도 감독의 생각은 필자가 보기에는 사감(私感)이 들어가 판단력이 흐려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컨트리 로드번역에 대해서는 미야자키의 손을 들어 주고 싶다. 비록, 자신이 끝까지 완성 하지 못했지만 전체 작품을 조율하고 적절한 인재를 찾는 직감은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곤도 감독이 옳다고 여기는 혼자서 살아가려고, 아무 것도 없이 마을을 뛰쳐나갔지의 가사는 앞으로 바이올린 장인으로서 살아가려는 세이지의 의지와 결심을 나타내는 데는 적절하지만, 시즈쿠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던 것이다. 세이지는 바이올린 장인을 꿈꾸면서 자기가 살던 고향을 등지고 이탈리아로 수련을 쌓으러 간다. 그 수행의 길은 자신의 가능성을 점치는 것이며 아무런 확신도 보장도 없는 길로 오직 반드시 꿈을 이루려는 신념을 가지고 떠나는 인생의 여정이다. 만약 세이지의 꿈에 대한 이야기로만 전개되었다면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작품에서 꿈에 대한 갈등구도는 시즈쿠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시즈쿠는 소설 창작을 세이지가 이탈리아로 가는 날까지 완성 시키겠다고 자신과 약속을 하는 동안에 부모님과의 갈등을 빚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조바심을 억누르고, 자신은 원석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기까지의 갈등과 결심은 컨트리 로드의 가사의 변화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

 

 

 

 

하얀 구름 위 피어오라는 언덕 아래를

 

まいてのぼる 

돌아 오르는 고개 너머의 마을

 

部屋 さな

낡은 방 작은 창문

 

 いた

내가 오길 기다리는 늙은 개

 

カントリーロード はるかなる

컨트리 로드 저 멀리

 

故郷 つづく

고향으로 이어지는 길

 

ウェストジーニア なる

웨스트 버지니아 어머니의 산

 

かしい わが

그리운 나의 마을

 

 

  귀를 기울이면에서 컨트리 로드의 가사의 내용은 세이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지만 컨트리 로드의 가사의 변화는 시즈쿠의 내면의 성장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즈쿠가 짜낸 번역의 초안은 원작 컨트리 로드의 분위기와 가깝다. 구름 아래의 평온함과 한가로움은 고향의 마을이 가진 정적이면서 정다운 정취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정겨운 풍경은 자신을 다정히 맞이 해주는 고향이라는 원작 영어가사의 의미를 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고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시즈쿠가 최종 완성한 컨트리 로드에서 과거의 자신과의 결별이 아닌 따스한 어머니의 품안으로 상징되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그 산을 거쳐 가는 길은 힘겹게 언덕을 돌아가며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하는 시련의 상징인 고갯길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마을로 이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의 근원의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즈쿠의 내면의 변화와 성장을 확연히 나타내는 소절은 바로 완성한 컨트리 로드의 가사에서 언덕()“에 대한 의미 변화 라고 본다.

 

(미완성)

하얀 구름 위 피어오라는 언덕 아래를

돌아() 오르는 고개 마을 (をまいてのぼる )

낡은 방 작은 창문

내가 오길 기다리는 늙은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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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

걷다 지쳐 멈춰 서면

떠올라 오는 고향 마을

언덕(봉우리)을 돌아가는 고갯길 (をまく )

그런 자신을 질책하고 있어

 

  보통, “귀를 기울이면에서 をまく를 번역한 것을 보면 거의 99.99%의 해석이 언덕을 감다 또는 언덕을 휘감다로 되어 있다. 대체 언덕을 감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칭칭 길로 언덕을 휘감는다는 말인데 언덕을 감는 것과 자신을 질책하고 꾸짖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덕을 감다라는 말은 잘 쓰지도 않을뿐더러 의미가 통하지 않는 오역에 가까운 번역이다. “감다라는 말은 일본어 감다라는 의미로 이러한 혼동이 언덕이라는 단어와 결합되어 언덕을 감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 기묘한 의미는 자기들(일본인)이 보기에도 이상했는지 누군가가 야후에 질문을 했다. “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をまく의 의미는 감다가 아니라 5번째의 의미인 우회하다” “회피하다 의 의미다. 등산 용어로 등산에서 정상을 피하여 우회하여 오르거나 위험한 곳을 피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나라 말의 "감다"에는 이러한 "회피하다"의 의미가 없으므로, 적절한 단어 선택이라 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완성)된 가사에서 돌아가는(まく) 마음은 고향과 결별하여 빛나는 원석과 같은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고난시련을 겪어야 하지만, 그런 두려움에 주저하는 자신을 질책하고 꾸짖는 것이다. 이것은 (미완성) 가사에서 돌아 오르는(まく) 고개 길과 대조적이다 (미완성) 가사에서도 같은 돌아가는(まく)” 의미의 단어를 사용했지만, 자신을 위로해주는 안식처의 의미로서 완성 가사 버전과 전혀 상반되는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이다. 즉, 같은 "まく"="돌아가다"를 사용하지만 ,완성 버전은 부정적으로 소극적인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다.

 

 

 

 

 

  또한 언덕()작은 산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가사 속에는 정상” “꼭대기” “봉우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언덕과 산의 의미를 나타내는 함축적인 의미로 시즈쿠가 번역한 웨스트 버지니아의 어머니의 산은 모성을 통하여 세상 만물을 감싸주는 추상적인 따스한 손이 아니라현실에서 살고 있는 마을 타마( (多摩市)의 언덕이며 이 언덕을 고되더라도 넘어서 외로움을 누르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이별을 고해야하는 고향의 상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된 가사는 자신이 갈망하고자하는 꿈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의지는 시즈쿠의 세계관의 변화이고 이 변화를 통해서 기존의 자신과의 결별하여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곤도 감독의 추진하려고한 초벌 번역은 시즈쿠의 내면세계의 성장까지 담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미야자키는 혼자가 된다는 것, 두려워 말고 살아가려고 꿈을 꾸었지로 고치면서 시즈쿠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전진하려는 열망을 간직하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진학하는 공부를 하는 이야기로 멋지게 매듭지었다.

 

 

  그렇기에 극중 마지막에서 세이지의 할아버지에게 소설을 보여주고 흐느낀 시즈쿠는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자질에 대하여 초조한 내면의 격정과 불안을 안고 있는 것이고 그런 시즈쿠의 내면세계와는 다른 세계관으로 번역을 한 것이다. 고향이라는 곳에 머무르고 싶어 하며 그 고향에서 뛰쳐나가 미지의 세상을 보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변화하고자 하는 인식은 바로 소설가로서의 이야기를 창출하고 유연하게 쓰는 갈망이다. 성공한 눈부신 소설가로서의 길을 염원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거칠고 투박하기만 하다. 하지만 시즈쿠의 깊고 깊은 심연 속의 원석은 무궁한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 사실을 세이지의 할아버지를 통해 깨닫게 해준 것이며, 이것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꿈을 위해 전진하라는 메시지 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즈쿠의 변화는 지구옥에서의 체험으로 인하여 시즈쿠가 바라보던 세계관이 변한 것이다. 자신은 부족하고 삶이 공허하고 지루하다는 것, 이러한 삶의 변화는 이상한 세계의 주인인 고양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소녀는 이상한 고양이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세상에 대하여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게 된다. 품고 있던 창작에의 열의는 소설가라는 꿈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꿈을 가진 소년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으로 발전되고, 이윽고 완성하기에 이른다. 라는 겉으로 보기엔 완성도 높은 청춘 애니메이션으로 비춰진다. 실제로도 우리나라 일본어 수업 시간의 일환으로 혹은 학교현장에서 재량시간에 나름 교육차원에서 성장영화로서 주요 상영목록 이라하고, 일본에서도 아동복지문화상(児童福祉文化賞)을 수상했다고 하니, 성공적인 청소년 성장영화로서 자리매김 했다고 본다.

 

 

 

     (세이지의 프로포즈 이후의 두 사람의 미래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들 )

 

  그러나 필자는 흥행에 성공한 청소년 성장 영화일지는 모르지만 원작의 주제와 깊이를 잘 살린 완성도 있는 영화라고는 보지 않는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말을 이해하려면 우선 영화 귀를 기울이면의 원작을 봐야한다. 언뜻 청소년의 꿈과 사랑에 대한 고민을 잘 풀어나간 듯이 보이나 애당초 미야자키는 소년 소녀의 꿈과 사랑이라는 별개의 이야기로 이해하여 각본을 썼으며 원작을 단순 사랑 이야기로 치부해버리는 우를 범했다. 그 결과 사랑의 완성된 형태로서 결혼을 맹세했지만 두 사람의 앞길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렸을 적엔 모르고(?) 볼 땐 좋았는데 나중에 어른이 되고 보니 이 두 사람이 맺어질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던지,

 

 

(지브리의 뒷이야기를 설명하는 어느 일본의 사이트에서 귀를 기울이면에 얽힌 이야기에 대한 설명으로 귀를 기울이면은 청소년의 자살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도시 전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또는 귀를 기울이면이 너무나도 "모범적인"  소년 소녀들의 행실에 반대로 이거 보고(자신의 청소년기와 비교 하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라는 의견이 있는 것은 원작이 가지는 중요 설정들을 삭제해서 나오는 필연적인 감상들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필자가 원작을 똑같이 차용 안 해서 폄하하는 것이 라고 보면 곤란 하다. 그렇다고 원작이 완벽하다는 걸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원작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이렇다 할 갈등 상황의 설정이 없는 점과 고양이 바론을 시즈쿠를 이끈 영혼의 멘토로 설정하는 것에 대한 박력이 부족하다는 점과 결론을 갑작스럽게 매듭지었다는 점 등이다.

 

  미야자키는 원작품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 본 것이 첫 번째 실책이고 두 번째로는 원작의 제목이 가지는 귀를 기울이면에서 시즈쿠의 세계관의 변화를 청각적인 의미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원작에서는 세이지가 화가를 꿈꾸는 소년이지만, 영화에서는 바이올린 장인으로 설정을 하고, 원작에서 세이지는 시즈쿠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유치함을 놀리는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컨트리 로드 가사의 유치함을 놀리는 것으로 각색했다. 결국, “단순한 사랑 이야기청각으로 이해한 것이 삭제 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삭제하여, 작품의 질을 떨어뜨린 결과를 빚은 것이다. 이런 미야자키의 몰이해 덕분에 사랑을 이루는 것과 꿈을 이루는 것이라는 양분된 이야기로 전개되고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결혼의 맹세도 지나고 나서 보니 회의적인 감상이 드는 것이며, 너무나도 충실히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메시지에 역으로 우울한 감정마저 드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컨트리 로드의 고향의 의미는 시즈쿠와 세이지의 꿈과 도전을 노래한 이야기이고 앞으로 나아갈 청소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린 새들은 자신이 머물던 둥지를 떠나고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는 의지와 결심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 올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찾아서 사회라는 거대한 숲속에 들어가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첫 발을 디디는 것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미야자키의 매세지인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이러한 메시지를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결과 기분이 다운(?)되는 관객을 양산했으며, 이는 원작에 대한 편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원작을 단순한 사랑만 있는 이야기로 치부한 그가 반대로 컨트리 로드를 통해 노골적인 행진가로 만들어 버린 모순을 저질렀다. 그로 인해 사랑과 꿈의 각 각 개별적 이야기로 진행되고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야자키는 원작의 제목에 해당하는 귀를 기울이면귀를 기울이다청각으로 이해하여 시즈쿠가 느낀 세계관의 변화가 편협하게 된 점이다.

 

  다음번 글 귀를 기울이면에서는 이러한 원작과 영화와의 비교를 통해 미야자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원작의 의의를 살리면서 영화의 메시지를 담는 방법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이끌어내는 소녀와 고양이의 만남에 대한 원작과 영화의 주제의 차이를 지적하고, 미야자키의 의도를 짚어 내고자 한다. 따라서 그 결과 사랑과 꿈이 별개로 이어지고 영화의 작품 전체가 협소하게 된 것을 이야기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