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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라노벨감상

연풍(恋風)ㅡ 그 남자의 마음의 자각과 구원

  연풍( 恋風koi kaze )은 요시다 모토이(吉田基己 이하 요시다 라고 한다.)의 대표작이다. 고단샤 만화잡지 이브닝에서 20019월부터 2004년까지 연제되고 20044~6월까지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고 만화책은 20148~10월에 신장판으로 재발매 되었다. 묘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연풍이란 작품의 저자가 여류작가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왜냐하면 이름부터가 남자 이름 모토이’(나중에 조사해보니 모토이는 남녀 다 같이 쓸 수 있는 이름이었다)이고 작품 깊숙이 스며든 남성의 영원하며 영겁적인 순수함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과 고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심리묘사를 세세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작품을 볼 때 남성의 실존에 대한 작품을 그린 남성작가가 있다고 생각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여류작가인걸 알았을 때의  받은 당혹감과 충격은 마치 영화 식스센스에서 접한  진짜 유령의 정체를 드러낸 반전이상의 감정이었다.

 

  이 세상에서 피폐해지고 생명에 대한 의지가 죽은 껍데기뿐인 남성이 순수 무구함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여성성(女性性)을 접하여 내면의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여류작가 따위가 그릴 수도 없거니와 그린다고 해도 결국 순수와 영원에 대한 갈망은 현실적 지상적 벽에 가로막혀 철저히 파멸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될게 뻔하기 때문이다. 굳이 작가가 여성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결말은 거의 대부분의 문학작품이나 대중문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결말이다. 다자이 오사무만 하더라도 인간실격에서 작품의 주인공 요조는 더러움을 모르는 처녀성으로 상징 되는 담배 가게 아가씨 요시코를 통해 너덜너덜해진 영혼과 육체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자신이 가진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가진 성스러움 속에 있던 추악한 본성을 깨닫고 성녀인줄 알았더니 창년 이었다는 식의 무구와 순수성의 내부적 모순을 알지 못 했던 무지와 어리석음에 의해 결국 자멸한다는 식의 결말이나 그것도 아니면 신카이 감독의 초속5센티미터라는 작품에서 타카키는 영원성으로 상징되는 아카리의 그림자만 계속 쫒다가 나중에 영혼이 사라진 좀비가 되었다는 식의 현실에서의 몰락과 혹은 사회적 매장을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 잊어버렸던 그리움에 대한 자각은 곧 자기 자신의 발견이었다. )

 

 

 

 그러나 연풍은 다르다 천진함과 순수한 여성성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작가 스스로 일반대중문화와 다른 시각을 가지며 구원에 대한 긍정적인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코 주인공은 현실에서 파멸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래의 진정한 나를 찾으며 퇴색된 과거의 나와  빛으로 가득한 현재의 자신을 모두 긍정하며  이러한 자신과 합일하며 화해를 통한 영혼의 각성과  마음의 성장을 이야기 하고 있다.  (원작이 아닌 애니메이션 버전 각본가는 반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킴, 이에 대하여 따로 후술 하겠다) 나의 좁은 견문으로 무구한  여성의 여성성에 대한 남성의 내적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쓴 작가는 괴테정도 밖에 모른다. 무수한 사랑 이야기가 있지만 그 속에서 남성의 근원적인 순수 또는 무구함에 대한 희구에 따른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랄 수밖에 없는 현실적 모순을 그리고 그 모순과 갈등 속에서 마지막에는 순수한 여성성에 의해 내면의 구원을 받는다. 라는 주제를  다룬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현대대중문화에서는 이러한 남성의 고뇌와 갈등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남성의 남성성을 다루는 대중문화들 혹은 남성향이라고 불리우는 작품들은 대부분, 특히 할리우드에서 사회나 가정에 대해 헌신하는 모습을 영웅적 혹은 감성적으로 나타내든지 그렇지 아니면 남성적 육체적 미를 강조한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남성향이라기 보단 차라리 여성취향에 가까운 오락문화가 대다수이다. 그런 것도 아니면 일본의 미소녀 할램등의 귀여움을 극한으로 추구한 여성 캐릭터에 대하여 탐미적인 미를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시대의 남성을 위한 남성성을 다룬 문화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 남성을 다루고 있지만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 지금 시대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인 현실에서 대다수의 남성작가조차 시도 하지 않는 구원의 가능성을 여성이 다뤘다는 사실은 선구적이면서 반시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양상을 보이는데 일본의 아마존 리뷰나 키타 애니 만화 독자들 리뷰를 보면 극찬을 하는 평가가 있는 반면 반대로 불쾌해하거나 범죄라는 등으로 폄하는 의견이다. 아마도 대부분 여성 독자로 추정되는데 부지불식간에 어리고 순수함으로 대표되는 여성의 여성성이 지상에서 쇠약해진 남성의 영혼을 구제한다.’ 라는 주제가 자신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나이 처먹고 계산과 타산에 젖어 이놈저놈 남자 갈아치우는 여자는 사실은 남성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안 돼 라고 하는 진실이 마치 그렇지 못한 여자는 잠재적 창녀라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친남매간의 사랑, 즉 근친을 주제로 한 것에 의한 거부감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의견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테마를 다룬 아키소라같이 절반이상이 노골적인 성묘사로 가득한 작품에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사회적 금기나 도덕적인 이유로 비판을 하는 감상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키소라에서는 반대로 나이차 나는 누나와 남동생이 나오는데 작품 속에서의 이야기 흐름은 성묘사를 위한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오히려 야해서 좋았다 라고 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은유와 비유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풍에 비해 노골적인 아키소라가 관대한 평이 많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키소라는 그냥 발정나라고 쓴 책이다 마치 av의 과격한 설정가지고 진지 빨고 욕하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아키라:단지 나는 보고 싶을 뿐이야... 그 남자와 그가 보는 세상을

(여름 전날 1권에 나온 대사 사실 이 작품의 나아갈 방향은 여기서 결정 된거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연풍은 형식적으로는 친남매간의 사랑이라는 겉으로 나타나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현실에서 나약하고 고립된 남성의 내면의 연약함의 자각을 통한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스토리의 형식과 실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른 것이 요시다 작가의 작품 특징이다. 예를 들면 요시다의 다른 작품 여름 전날같은 작품에서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도 탁하고 불순한 연상녀와 그와는 정반대의 대극에 선 미대생과의 농염하고 관능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형식적인 플롯을 취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사랑이야기 자체는 형식에 불과한 것 이고 진짜 메시지는 순수함과 초월성을 상징하는 미대생 테츠오를 연상녀 아키라 자신의 내면 또는 심상 속에 이상적 초월적인 그 남자의 모습을 투영 또는 일체화 시켜서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는 비일상의 체험과 유희의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본질을 보지 못한 독자들이 결말이 슬펐다느니 마음에 안 든다느니 실망스럽다느니 테츠오가 개xx 라는 등 엉뚱한 말들을 하는 것이다. (왜 이 작품이 하고자하는 말이 순수한 청년과 세상에 농익은 여성과의 사랑이 주제가 아닌 초월적 체험과 유희인지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설명 할 것이다)애당초 저자는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그릴 생각도 없는 데도 말이다 삼류여류작가들의 자위용 드라마나 소설 같이 늙고 더럽고 닳고 닳은 여자에게 젊고 미남에 키타 등등 능력 있는 남자가 죽고 못 살아 물고 늘어지고 나중에 둘이 잘된다는 식의 이야기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멘붕오는 결말일 것이다.

 

  이런 겉으로 드러난 형식에 치우쳐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의 본질을 보지 못 한다 따라서 코시로의 내면에 잠들고 있던 마음의 자각과 구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4가지로 구성하여 각각 긴밀하고 연관 있게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첫째는 코시로의 마음의 자각에 이르는 과정과 결말에 대하여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숭고하게 끝을 맺었는지에 대해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이야기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연풍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의 여성상(女性像)에 대하여 각각의 캐릭터 상의 상징성에 대하여 어떻게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각성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것 이며 세 번째로는 꽃과 바람 그리고 유원지가 가지는 공간적 시간적 초월적 상징성이 두 사람의 결정적 사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쓰고자 한다. 네 번째는 애니메이션 버전의 감독이 전하려는 파멸적 결말과 원작과의 차이를 통해 비교하면서 원작자가 전하려고 하는 영원의 의미와 코시로의 성장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감독은 나노카의 상징성과 키타 꽃이나 유원지 바람 같은 자연에 대한 제제가 가진 상징성에 대하여 확연히 인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원작가와  반대되는 결말을 제시 했고 이 때문에 연풍이란 작품이 대중들에게 친남매간의 사랑이 진정한 주제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 했던 것이다.  나노카의 상징성과 코시로의 내면의 자각이란 측면이라는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한다면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친남매간의 사랑' 이라는 주제가 나올 수 가 없으며 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 할 것이다.

 

   작품 연풍에서 다루는 주제는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금기를 이야기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형식적 구조 속에서 감추어져 있는 작가의 진의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순수성으로 표현되는 올곧은 여성의  한결 같은 타인에 대한 마음이 야말로 남성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는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에 가려져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진의에 감응하여 설명은 잘 못하지만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극찬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며 그런 기대에 부응에 10년이 지난 후에 신장판으로도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무지와 어리석음에 의해서 혹은 여성주의 담론에 정신이 인식이 오염 세뇌되어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풍이라는 작품은 이 시대의 대중문화가 침묵하는 진정한 남성이 가지는 고뇌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와 구원에 대한 긍정적 관점 그리고 남성의 욕망에 대한 이해를  남성작가도 아닌 여류작가가 썼다는 사실은 가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이 시대가 남성의영혼의 성장과 바람에 대하여 무지한 것이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본질을 보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시대의 근기 낮은 인간들이 가지는 한계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